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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Feb 07. 2022

엄마가 소리 좀 질러보라고 했다

몇 년 전 부모님은 생계로 꾸리던 가게를 접고 산골 마을로 이사했다. 얼마나 외딴곳이냐면, 예전에 다녔던 시골 국민학교에 딸린 분교가 지금 부모님이 사는 그 마을에 있었다.


분교에서 본교로 올 일은 더러 있었지만 우리가 분교로 갈 일은 잘 없었다. <슬기로운 생활>에 나오는 플라나리아만 아니었다면. 1 급수에 산다는 플라나리아는 그 동네의 상수도 보호구역에서만 서식했다. 어린 플라나리아 채집대를 위해 선생님이 자동차를 수소문해 분교로 갔다. 전설 속 동물 같았던 플라나리아를 잡아 칼로 자르고, 그 몸이 새로운 몸이 되길 기다리면서 나는 광역시에서 견학 온 학생인양 굴었다. "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지금은 마을 경로당이 된 그 분교에서도 30분은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부모님의 새 보금자리는 앞으로는 맑은 하천이, 뒤로는 솔숲을 시작으로 하는 국립공원 산자락이, 옆으로는 밭두렁과 무덤들이 무심하지만 넉넉하게 펼쳐져 있다.



일평생 노동만 해온 그들은 은퇴를 하고서야, 몸에 하나둘 병이 깃든 뒤에야 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다. 걷기였다. 산을 면했다고는 하지만 그 산은 자연인이 숨어 살 것만 같은, 등산로 같은 거 없이 종종 멧돼지도 나오는 산이기에 그들은 산 대신 도로를 끼고 걷는다. 둘이 걷는 일은 잘 없고 동네 친구들 서너 명과 걷는데 이 크루는 명절 땐 쉰다.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는 시간이다. 역시 가정에 충실하러 온 우리가 명절 한정 크루가 된다. 뛰기 좋아하는 손녀 하나, 딸 둘 혹은 하나, 그리고 사위 하나를 70 전후의 그들이 친절히 이끌어준다.


해 아니고 보름달


온 가족이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산책길은 예상보다 왁자지껄하다. 어느 추석 땐 꽉 찬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고 반딧불이를 잡아 그 불빛 따라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개구리알을 구경하고 활짝 핀 진달래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의 모습에서 유년시절 혼자 먼 길을 걸어 등하교를 하던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 8살 내 손을 아빠가 잡아끌어주는 기분도 든다. '걸음이 날랬던 엄마가 왜 저리 뒤처져 걷나' 슬그머니 걱정이 들던 찰나 엄마의 결기 있는 목소리가 매서운 겨울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화답해온다.


"야! 야들아 소리쳐봐라! 아아아! 뱃속에 힘 딱 주고 소리 지르면 땀이 쭉 난데이."

상념 따위 개나 주라는 듯 엄마의 패기 있는 소리가 산골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간다. 도시 아파트에서 조심조심 사느라 힘들었을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를 따라 한다. 나도 소리치고 싶은데, 도시에서는 욕지기가 치밀고 고함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목구멍을 넘지 못한다. "너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소리 질러 볼래. 함 해봐라. 아!" 엄마의 재촉에, 계속되는 엄마의 솔로곡에 하모니를 얹는다. 겨우 내본 소리는 "야~~~~ 호". 그 짧은 순간에도 동물들 겨울잠 깨면 어쩌지 걱정을 하는 나는, 정말이지 글렀다(산속이 아니라 도로와 논밭을 면한 곳인데도!). 근처 나무 몇 그루나 들을까 말까 한 새침한 소리를 비웃듯 엄마의 "야아아아아아앗!" 소리가 앞산에서 메아리쳐 달려든다.



고향을 떠나 집으로 오자마자 엄마의 비명인 듯 호령 같은 통쾌한 외침이 떠오른다. 다시 시작되는 온갖 걱정, 책임질 일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고르며 크게 호흡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을 열어젖힌다. 다급히 입을 막아본다. 그 산에서 더 맘껏 소리 지르고 올걸. <화초장 타령>을 개사해서 부르는 엄마에게 "아휴 못살아" 하지 말고 따라 불러볼걸. 억눌린 것들을 다 끄집어내 풀어헤쳐 놓을걸.



오소희 작가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유년을 두 번 사는 축복"이라고 했다. 그 말 덕분에 아이와 놀아 '준다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엄마, 치타 그려줘" 하면 말라버린 예술혼을 후후 불어가며 선을 긋고, "와 엄마 진짜 잘 그린다"는 칭찬에 으쓱해하기도 한다. 아이가 하자는 대로 놀이터에서 신발도 벗어보고 열심을 다해 솔방울을 줍고 하늘의 구름 모양을 관찰한다. 아이의 말과 행동은 내겐 빛이었다. 함께하는 그 시간을 통과하며 책임감에 휩싸여 늘 외롭고 긴장했던 내면아이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질 수 있었다.


한편 나이 든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짐스러웠다. 하지 말라거나 하라거나 두 종류였다. "내가 살아보니" 아니면 "내가 해봤는데"가 뒤따랐다. "그만하면 괜찮다", "니 생각이 그랬구나"라는 말을 해주는 어른은 잘 없었다. 멘토로 삼을 만한 윗사람, 지혜가 말과 행동에 밴 어른들은 미디어에서나 나왔다. 물론 엄마 아빠는 날 지지해주지만, 내게 하는 말들도 걱정과 사랑 때문임을 알지만, 나는 그 말들에 자주 피곤했다. 사실 대부분은 그 말들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피곤한 상태여서 그들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 간다.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좀 덜 피곤해졌기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나를 찌르는 말이 별로 없다. 듣기 싫은 구닥다리 어른의 말, 순수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아이의 말로 딱 나눌 일도 아니다.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아이처럼 소리 지를 수 있는 엄마가 너무 부럽다. 다음번에는 엄마 말 잘 들어야지. 크루 중에서 가장 크게 소리 지르고 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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