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는 사람의 먹는 취향에 관해
집에 돌솥이 하나 있다. 그 돌솥으로 말하자면 자취 4~5년 차에 전기밥솥밥이 아닌 특별한 밥을 해먹겠노라 주장하며 엄마의 식당에서 가져온, 몇몇 자취방과 이사를 거쳐 신혼살림에 당당히 합류한 연식 20년의, 너무 무거워 두 손으로 들어줘야 하는 진짜배기 돌솥이다. 돌솥의 존재를 밝히면 “요리 좀 하시나봐요”라는 말이 꼭 따라붙는다. 눈치 없는 사람한테 “주부백단(요즘 시대에)이신가봐” 하는 말도 들었다. 지금이야 오이냉국도 만들어보고 멸치볶음도 해봤지만 당시만 해도 할 줄 아는 반찬이 없어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넣어 비벼먹는 게 수월해 자주 돌솥을 불에 올렸다.
그날 저녁, 그 돌솥으로 밥을 하고 싶었다. 피곤해보이는 그녀를 한 끼의 노동에서라도 해방시키자. 내세울 만한 요리실력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때려넣어 양념장에 뜨끈하게 비벼먹고 누룽지까지 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만능 들솥이 내겐 있으니까. 그해 여름 수족구, 구내염, 감기를 차례로 앓은 아이를 돌봐주느라 엄마가 우리 집에 와 있던 참이었다.
“뭐 넣노?”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얘가 왠일로’ 하는 눈빛도 숨기지 못한 채 엄마가 다가왔다.
"왜, 나 대학 다닐 때 가져갔던 돌솥 있잖아. 그걸로 콩나물밥 해먹게." 버섯을 좀 썰어넣고 콩나물을 넣고 마지막으로 다진 돼지고기를 좀 올리려는데,
“나는 돼지고기 안 넣은 게 좋던데”.
훅 들어온 엄마의 취향.
분명 있지만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어느 문파의 비기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의 취향.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떠오른다. 바닷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해물은 환장하되 육고기는 소고기만 즐긴다는 걸. 그때 엄마가 밝힌 취향 앞에서 나는 미슐랭 3스타 오너쉐프인 양 말했다.
“엄마 이건 돼지고기 넣어야 맛있어. 해주는 대로 잡숴봐.”
엄마가 나만큼 맛있게 먹지 않았다는 것, 그 대화가 아직까지 명치 언저리에 걸려 있다는 것, 내 레시피가 뭐라고 그냥 돼지고기 뺄걸 하는 후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를 고등학교 때 불렀던 인간이라면 으레 갖췄어야 할 소양이 내겐 없구나 하는 자괴감, 그런 것들이 범벅이 돼 반성문 같은 이 글을 쓰고 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포도라는 것을, 씨를 뺀 포도를 아이 입에 넣어주다 알게 되었다.
엄마는 면 중에서 해물이 많이 들어간 짬뽕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 낳은 나를 돌보러 온 엄마에게 짬뽕을 시켜주다 알게 되었다.
엄마는 아그작아그작 찐쌀, 오도독오도독 강정같이 딱딱한 간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무른 것만 찾는 아이의 입맛을 불평하다 알게 되었다.
엄마는 평생을 남을 먹이는 데 썼다. 양친을 일찍 잃고 결혼하기 전까지 큰이모와 둘째이모는 돈을 벌었고 셋째인 엄마는 주로 집안일을 하고 음식을 만들었다고 했다. 결혼하고는 우리를 먹이고 우리를 먹이기 위해 식당을 열어 남을 먹였다. 남들 중엔 공사장 인부도 있었고 관광지에 놀러와 맛집을 검색한 이들도, 동네사람이나 근처 회사의 회사원들도 있었다.
타인을 먹이느라 자신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손님이 휘몰아치고 난 뒤 밥을 물에 말아 김치와 먹거나, 아예 김치국밥을 끓여 후후 불어 먹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맛있어서 마신다며 자주, 박카스 뚜껑을 힘차게 땄다. 함께하는 식탁에서 늘 생선뼈를 발라 살코기를 놓아주던 엄마, 자기 밥은 늘 마지막에 푸는 엄마, 모두에게 국을 퍼주고 자긴 국이 별로라고 물에 말아 먹고 싶다던 엄마, 이 맛있는 것을 왜 모르냐며 생선 뼈를 쪽쪽 빨던 엄마, 먹는 것에 취향은커녕 그저 굶어죽지 않으면 좋았을 시기에 나고 자란 엄마. 엄마의 음식 취향은 모르면서 엄마가 식탁과 음식을 둘러싸고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는 이렇게도 기가 막히게 또렷하다.
어떤 태도는 대물림되기 쉽다.
아이에게 잘 익은 딸기의 빨간 본체를 잘라주고 밑동은 내가 먹는다.
비싼 복숭아의 뽀얀 살은 그것만큼 뽀얀 아이에게 주고 남은 심지를 돌려깎기하듯 먹는다.
100g에 5천원하는 블루베리는 아이에게 사주면서 가끔 나를 위한 커피 한잔에도 인색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생선이 아니라 육고기인데, 둘 다 하긴 귀찮으니 생선만 요리해 아이를 주고 나는 대충 먹는다.
"초음파 봤는데 쓸개라 카던가 콩팥이라 카던가 돌이 있다는데?"
가끔 심장이나 맹장이 어느쪽에 있는지 헷갈리는 나다. 그런 나의 엄마 다운 설명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담낭에 생긴 건지 신장에 생긴 건지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을 더 통화해야 했다. 그리고 엄마는 쓸개, 그러니까 담낭을 제거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가 수술 무용담과 함께 꺼낸 것은 쓸개에 자리했던 돌. 그것이 사리도 아닌데 왜 몸에서 나온 돌을 집에까지 갖고 온 건지 놀라고, 그 돌의 사이즈에 또 놀랐다.
쓸개 빠진 엄마는 소화를 어려워했다. 이제 좀 먹고 살 만 하고 자식들 다 독립하고 손주도 생겨 그 입에 들어가는 것 넣어주며 자기도 좀 먹으면 좋으련만. 그 좋아하던 소고기도 조금 먹더니 "배가 부르네" 하고 젓가락을 슬그머니. 친한 동네 동생이랑 둘이 가서 소고기를 십 몇인분 먹었다고 또 가야지 해놓고는 다시는 그런 먹성을 보이지 못했다. 칼을 뽑아 무 하나 잘라 먹고 다시 칼집에 칼을 넣은 우리 엄마.
언젠가 Y 팀장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어머니와 친구분을 모시고 여행을 갔는데 어린 아이와 여행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매워서 못 먹고 소화가 어려워 못 먹고 딱딱해서 못 씹어 못 먹고, 그런 것들을 다 빼니 사드릴 게 없더라고. 메뉴 고르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약간의 안쓰러움을 동반한 불평이었다. 먹을 수 있는 시간과 돈은 있는데 몸이 허락하지 않아 먹지 못하는 순간들이 꼭 온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은 모두에게 공평할 것이므로 나도 엄마가 맞이할, 엄마 뒤에 내가 맞이할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거북목이 안 되려고 살짝 턱을 당기는 정도의 긴장감을 갖고 나는 그 태도를 바로잡아보기로 했다.
엄마가 내 아이에게 맛난 것을 먼저 주려고 하면, 이렇게 말할 테다.
"엄마, 얜 앞으로 맛있는 거 먹을 날 많은데 우리가 먹읍시다!"라고.
뜨거운 여름 짜증 대신 짜장을 볶으려고 불앞에 서면, 이렇게 소리칠 테다.
"엄마, 짜장면은 쫌 시켜먹자!"
"그때 니가 보내줬던 복숭아 한 상자 얼마더노?" 하고 물으면 가격을 말해주지 않을 테다.
그냥 한 박스 더 주문해줘야지.
그래서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돌솥에 불 올리러 갑니다. 오늘은 엄마가 없으니 내 취향대로 돼지고기 넣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