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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Sep 06. 2021

그 삘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전화통화를 꺼린다. 전화로 해야 하는 단골 족발집 주문은 욤욤님이 해주고 냉장고 출장 서비스 신청은 앱으로 한다. 전화로 불만을 접수하는 게 싫어서 동생에게 부탁한 적도 있다.


그런데 20년 만에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통화 버튼을 누르는 데는 1초의 망설임도 끼어들지 않는다. 어색하면 어쩌지, 잘못된 번호는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왜 이럴 땐 안 하는 걸까. 그저 '선생님과 연결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 밝혀진 곳마다 헤딩하는 한 마리 불나방이 되어버린다.


생각해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싫어하는 것들, 결정 못하는 것들, 망설임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거나 아몰랑 하고 미루며 축 늘어져 있다가 불현듯 머리에 전구가 켜지면, 마치 10년은 다듬은 계획을 실행하는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든다. 망설임과 결단력 사이에 조금의 어정쩡한 포즈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극단을 오간다.


대학 졸업식 대신 여행을 떠난다던가, 아무런 뜻도 계획도 없이 취업 대신 대학원을 택한다던가, 회사를 돌연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간다던가, 아프리카 가면 학교에서 봉사를 좀 하고 싶은데 학생들한테 도움이 되려면 영어는 좀 해야겠지 하며 덜컥 여행경비에 맞먹는 돈을 필리핀 어학연수에 쓴다던가, 두 번 만난 남자와 사귄다던가, 4개월 만에 그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다건가 하는 것들. 점심 메뉴는 못 골라 "나 뭐 먹지?"를 남발하면서 인생의 큰 결정은 삘 대로 해버리고 중요한 순간에 내지르는 나라는 인간.


그런데 문득 그 삘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닌가 싶다. 우물쭈물 하며 같은 자리를 맴맴 맴돌다 계시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저기로 한 발짝 가고, 또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다 이쪽으로 한걸음 움직인다. 쭉 뻗은 직선은커녕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발걸음들이 어지럽다. 그렇더라도 뒤돌아보면 처음 서 있던 곳과는 제법 멀어져 있다. 어찌됐든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 삘이라고 뭉뚱그린 것은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며 내내 눌러온, 내가 진짜 욕망하는 것들이 아닐까.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잘 익어 터져버린 여드름 같은 그 삘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오늘도 잘못 욕망한 것들에 발등을 찍히며, 또 어떤 욕망에는 만족감에 차 어깨를 들썩인다. 한걸음 한걸음 정해진 방향으로 차곡차곡 나아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때로 뒤돌아보면 그간의 길이 별자리처럼 빛나보일 날도 있을 거라고 위로하면서. 다음에 폭발할 욕망은 무엇이고 날 어디로 데려가줄까 궁금해 하면서.


그러다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누르던 마음처럼 어쩌면 이번 한 번 만큼은 피어오르는 욕망을 모른 체 말고, 여드름이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한 번쯤 건드려 보는 게 어떨까 싶으면서. 전구에 불이 들어오려고 깜-박 깜-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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