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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Feb 12. 2022

경험주의자의 변심

“저는 경험주의자입니다.”


취업을 준비하며 고심해 골랐던 자기소개서의 첫 문장. 어중간한 학점에 영어 점수 하나 없이 나를 써달라고 어필하려니 스펙 대신 쌓은 그간의 행적을 포장할 말이 필요했다. 어학연수니 공모전이니 인턴이니 이런 거 하나 없이 ‘동아리 활동’ 한 줄로 요약되는 대학생활과 졸업을 코앞에 두고 떠난 배낭여행, 전혀 다른 전공으로의 대학원 진학이 말이 되게 해야 했다. “해보면 알겠지. 해봐야 알지” 식의 태도가 내게도 없진 않았으니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경험’이라는 단어는 실로 신비했다. 속이 덜 찬 붕어빵처럼 납작해 보이던 나의 20대가 포장지 하나 씌웠을 뿐인데 통통하고 윤기 있어졌다. 빠르게 자소서를 채워나갔다. 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경험에서 뭘 배우고 어떻게 나아졌는지. 그러니까 나는 좋든 나쁘든 경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므로 회사에 들어가서 하게 될 모든 일을 기꺼이 즐길 것이고 그 회사 또한 나와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면접에선 주르륵 낙방했지만 서류는 대부분 붙었던 걸 보면 꽤 먹혔던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올 때까지 꾸준히 써먹은 그 자소서는 폐기되었다. 그때 '경험'을 내세우면서 결국 하려 했던 말이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성장을 원치 않는다. "괴롭고 힘든 경험이(어쩌면 그런 경험들이기 때문에)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류의 문장들이 취업문을 뚫는다는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데 쓰였음을 아는 까닭이다.

우간다, 2010


그 경험, 꼭 필요했을까. 하지 않으면 더 좋았을 경험도 많았을 텐데. 슬픔을 누르고 역경을 인내하고 두려움을 꾹 참고 외로움을 견디는 그런 식의 단련이 내게 노하우와 굳건함을 전수한 게 정말 맞나. 얼굴이든 표정이든 티끌 하나 수심 한 조각 없는 친구들이 더 단단하고 유연한 걸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학교가 멀어 혼자 먼 길을 걸었던 것이 여덟 살에게 어떤 용기를 주었나, 서울로 진학해 혼자 방을 구하고 입학하고 생활을 꾸린 것이 스무 살을 얼마나 책임감 있게 만들었나, 포터도 가이드도 없이 혼자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가 고산병을 겪은 게 스물넷을 어떻게 강단 있게 해 주었나. 경험을 성장서사로만 엮은 탓에 용기와 책임감과 강단 같은 미덕들의 이면을, 드리운 그림자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림자는 마음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마흔이 지난 지금에서야 검은 덩어리로 불쑥불쑥 치민다.


사실 성장을 빼면 이런 스토리가 남는다.


8살의 나는, "무서웠어요. 긴장되었어요.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걸어야 했고 자동차도 조심했어요. 어른들이 해낼 수 있다고 말하니까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생각했어요."

스무 살의 나는, "두려웠어요. 고향을 떠나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새마을호는 타본 적도 없었고 지하철도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이제 어른이니 할 수 있다고 다독였어요."

스물넷의 나는, "멍청하죠. 준비 부족이었어요. 젊음도 뭣도 아니에요. 포터나 가이드를 쓸 돈으로 좀 더 여행을 하고 싶었거든요."


경험치가 쌓여 만렙이 되는 건 게임에서나 하라지, 더는 사양이다. 그저 ‘겪는 나’를 돌보려 한다. 뒤틀린 경험 속에서조차 기어이 한 조각의 빛을 발견하려 안간힘을 쓰는 대신 그냥 마음의 자락들을 맨눈으로 들여다보고 남은 자국의 모양을 살피며 혹여 구김이 가면 살살 펴주기나 할 테다. ‘특별한’ 경험이 아니어서 지나쳤던 하루하루를 적어 내려 가면서. 무한하게 반복될 줄 알고 던져두었던 일상을 매만져가면서.


이래 놓고는 아이가 앞으로 겪을 이런저런 일들을 상상하면 머리끝까지 아득해진다. “너는 살면서 좋은 것만 경험하면 좋겠다!”는 말은 가슴으로 삼킨다. '겪는 아이’ 곁에서 어떤 표정으로 있을지, 안아주고 하이파이브하고 손뼉 치고 함께 울어주며 어떤 눈빛을 보낼지, 그런 것들을 생각키로 한다. 이렇게 어떤 글감이든 결국엔 아이를 떠올리고 마는 엄마됨이라는 어마어마한 경험에 대해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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