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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Sep 30. 2021

우린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나고 있어

BTS <소우주> 들어봤니


대학 시절 동아리에는 낙화주를 마시는 문화가 있었다. 봄에 흩날리는 눈발, 추락하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벚꽃잎이 질 때면 한데 모여 술잔을 들었다. 지고 마는 것들을 안쓰러하고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또 한 번의 봄날을 아쉬워하며 술잔에 떨어진 꽃잎을 후후 불어 마셨다. 스무 살 첫 낙화주를 마시는 자리, 그 선배를 처음 만났다. 교내에서 마시고 밖에서 이어진 술자리에서 선배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얘들아, 너희들 각자는 하나의 우주야,
소우주!"

사실 취한 선배의 말은 저것보다 훨씬 길었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취해 있었기에 저 맥락의 문장 하나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선명한 건, 그 문장을 앞에 두고 조금 울었다는 사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지나도 개운하기는커녕 앞으로의 인생이 막막하기만 했는데, 내가 그저 나로 충분한 하나의 소우주라는 게 너무 기뻤다. 그리고 별처럼 빛나는 그 문장을 마음의 윗방에 걸어두고 앞길이 어둑하거나 외로울 때 불을 밝혔다.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world

BTS <소우주>의 노랫말을 들으며 마음의 윗방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아 반짝이던 문장에는 먼지가 앉았고 어두컴컴한 방 안의 공기는 묵을 대로 묵어 텁텁했다. 얼마 만인가 세어보니 꼭 10년이었다. "각자의 방 각자의 별",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우리 그 자체로 빛나"... 내가 취중에 기억에서 날려버린 선배의 말들이 저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꼭 그때처럼 조금 울었다. 숲길을 산책하던 참이어서 땀을 닦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소우주는 그 방에 그대로 있었는데 사느라 바빠 그걸 잊고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어쩐지 안쓰러워서였다.



마흔이 넘어도 처음인 게 많을 수 있단 걸 알게 된 올해, BTS 음악에 이어 글쓰기 수업도 처음으로 들어봤다. 생전 처음인 사람들을 화면으로 만나 그 자리에서 던져진 글감으로 글을 쓰고 낭독했다. 다른 이들의 글을 귀로 들으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내놓은 문장이 부끄러워졌다. 저들의 표현, 묘사의 깊이, 문장의 구조, 아이디어는 왜 저토록 빛날까! 그에 비하면 나의 글, 이 철 지난 일기장 같고 아침 드라마처럼 뻔한 내용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가 각자의 발등이 아닌 다른 이들의 뒤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오소희 작가가 말했다.


얘들아,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속도대로 써.
내 글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자신감을 갖고.
은희의 이야기는 은희만이 쓸 수 있고 민주의 이야기는 민주만이 쓸 수 있는 거야.

누군가의 글과 비교하느라 뒤척이던 이십 대의 내가 떠올랐다. 쓰기도 전에 안 될 거야(무엇이?) 망할 거야(여기서 뭘 또 얼마나?) 시간 낭비야(이미 넘치는데 낭비 좀 하면 어때서?)를 외치며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내가.


후회는 늦고 인생은 짧다. 하지만 괜찮다. 돌아왔지만 결국 이렇게 알아버렸으니. 문장이 좀 매끄럽지 않아도, 표현이 힙하지 않아도, 때론 뭐 좀 식상해도 세상에 하나뿐인 내 이야기는 나만 쓸 수 있다는 걸.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주인이라는 걸.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읽을 거란 걸. 무엇보다 나를 들여다보고 쓰는 이 시간이 이토록 충만한 걸, 다 알아버렸지 뭐야.


이렇게 스물에 들은 소우주와 마흔에 다시 만난 소우주와 n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얽혀 커다란 열기구를 하늘로 띄운다. 높이 높이 올라가다가 대기권을 넘어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는 우주로 접어든다.


참, 열기구에 같이 탄 친구들이 있다. 글은 결국 나였으므로 속 깊은 곳까지 다 까뒤집어 탈탈 털어 보인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고도 함께 글을 쓴다. 조금씩 쌓여 가는 글 속에서 서로의 역사를 알고 각자의 빛남을 오래 들여다보며 그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후후 불어준다. 그러는 와중에 잊고 지내던 것들이 떠올랐다. 뒤척이던 젊은 날들 중에는 술 마시고 비틀대며 집에 와서도 싸이월드에 접속해 일기를 쓰던 밤들과, 애정하는 소설가의 신간을 읽다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놓쳤으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던 순간이 있었다. 또 ‘이게 즐겨찾기에 저장돼 있는 이유가 있을 텐데’ 싶어 휴면 계정을 해지해 접속해본 오래된 블로그에는 정말 까맣게 잊었던, 재고 따지면서 묵혀둔 그때의 이야기들이 거칠게 숨 쉬고 있었다.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으려 결국 나는 쓴다.


n개의 , n개의 소우주, n개의 이야기. 이건  글쓰기에만 국한된  아닐 것이다. 당신에게도 먼지  마음의 방이 있다면, 오늘 그곳을 활짝 열어  밝혀보길. 그 누구도 대체할  없는 당신이어서, 당신인 것으로 이미  괜찮은 지금을 만끽하길.


P.S: 이 글감은 벚꽃 흩날리는 봄에 쓰려고 넣어둔 건데 함께 쓰는 그녀들에 대한 애정이 불쑥불쑥 튀어올라 도리 없이 지금 쓴다. 꼭 그때여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이것도 우리들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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