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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ug 26. 2021

샐러드 생활자의 수기

얼마  오래된 여행일기장을 들췄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생각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글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빌려왔다. 그가 들으면 얼마나 황당할까마는.  여행에서   책을 읽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게스트하우스에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인도 여행씩이나 와서 그런 책을 읽고 앉았겠는가, 그런데 그게 나였다. 마흔살 주인공이 스물넷 시절을 회상한다는 소개글만 보고 펼쳐들었겠지, 하필  나이 스물넷이었으니. 어쨌거나  책을 들고 인도의 작은 소도시로 흘러든 한국인 여행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애쓰며, 아니 것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려 애쓰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보다  자주 옥상 너머로의 풍광에 눈을 빼앗겼던 스물넷의 2월이었다. "무엇을 먹는지가  사람을 결정한다" 류의 말은 달팽이관은커녕 외이도조차 타고 넘어오지 않던, 그야말로 돌도 씹어먹던 때였다.


그리고 나는 스물넷 시절을 추억하며 주절주절대던 지하 생활자 그 사내의 나이, 사십줄이 되었다. 이제 먹는 것과 사는 일이 얼마나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지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먹는 행위에는 내 태도가, 취향이, 삶을 대하는 관점이, 건강정보가, 심지어 자제심이 얼마나 부족한지까지 모두 들어가 있다.


회사를 쉬면서 가장 좋은  먹고 싶을  먹고 싶은  먹을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앉아서만 일하던 회사에서 소비하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컸던지 먹고 싶은  먹다 보니 금세 몸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혼자 먹는데 굳이, 하면서 대충 깔딱허기만 면한 것도 이유였다. 나의 기초대사량은 '기초' 방점이 찍혀 있었으므로 정말이지 먹는 것을  돌봐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하루에  끼를 먹는 . "니가 오늘  챙겨먹은 끼니는 평생을 챙겨먹을  없다"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딸에게 신신당부했던, 소주를 불콰하게 마셔놓고도 끼니는 별개라며 엄마에게 밥상을 요구했던, 무뚝뚝한 한편 다정하고 이상한 식으로 용감했던  아빠가 들으면 까무라칠지도 모르겠지만. 회사 다닐  아침에 탄수화물을 넣어야 머리가 돌아기에 빵이든 떡이든 두유든 뭐든 씹고 삼켰는데 지금은 아침 저녁 육아를 제외하고는 노동을 하지 않으니 굳이  끼를 먹을 필요가 없지, 하며 끼니를 줄였다.


두 끼니 중 한 끼는 대체로(깨기 위해 결심하는 것마냥 너무도 느슨한 나란 아이는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먹기도, 어제 시켜먹고 남은 치킨을 먹기도 했지만) 샐러드를 먹었다. 회사를 쉬고 있는 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샐러드를 사서 먹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겠지만 매년 일구던 작은 텃밭에 샐러드 채소를 늘렸다. 상추나 쑥갓의 비중을 줄이고 로메인, 레드치커리, 샐러리 같은 이파리류에서부터 적토마토와 그냥토마토까지, 바질 씨앗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샐러드 탄생을 거슬러가다 보니 텃밭까지 왔지만,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글인가 텃밭인가.......


한철 밭에서 나는 것을 뜯어다 샐러드를 열심히 만들어 먹었다. 거기에 파프리카, 당근 같이 아삭한 식감을 주는 채소를 더하고 아보카도, 구운 버섯을 곁들이기도 했다. 단백질은 달걀이거나 닭가슴살이거나 훈제오리이거나 소시지거나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보통은 모짜렐라지만 부라타치즈로 사치를 부려보기도 했다. 탄수화물은 식사빵 아무것에 버터를 텁게 올리거나 크림치즈나 바질페스토, 후무스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돌려가며 발라먹는다. 빵이 없을  그냥  한숟가락 크게 퍼서 함께 먹기도 한다.


소스 칼로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절제하던 이십 대 시절의 나야, 보고 있니? 소스는 먹고 싶은 것을 뿌려 맛있게 먹어도 된다. 아무렴. 귀찮아서 올리브유와 발사믹으로 통일하긴 했지만 오이와 삶은계란을 대충 으깨 마요네즈를 듬뿍 뿌려 먹어도 좋다. 질 좋은 오일과 소금만 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샐러드 사진에는 진심이 아니었구나....


샐러드에 진심이 되고 보니 샐러드는 정말 쉽지 않은 식사다. 요즘 텃밭의 여름 작물이 모두 끝나 샐러드용 채소를 사먹어 보니 더욱 실감이 든다. 싱싱한 채소를 바로바로 구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또 적당히 돌려먹을 주변 재료들도 챙겨야 한다. 허구헌날 '양상추 + 닭가슴살' 조합만 먹을 순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것"을 조합해 먹으려면 재고를 파악하면서 냉장고를 채워둬야 하는 수고가 뒤따른다. 이왕하는 수고에 좀 더해 재료 손질은 적당히 한번에 해두는 게 좋다. 막상 먹을 땐 재료가 든 통을 꺼내 이것저것 툭툭 뜯어 올리고 단백질에 열을 가해 먹는 수준이 되어야 편하다. 모든 결과물은 한 접시에 담을 것. 설거지는 접시 하나와 포크 한 개로 끝낸다.


정말 샐러드에 순정이라면 채소탈수기 하나는 놔줘야 한다. 아이를 돌보며 손목 관절이 나빠진 우리에게 물기를 탈탈 턴다는  불필요한 노동이니까. 샐러드바 채소처럼 적당히 수분감 있는 아삭거림을 즐기고 싶다면, 물기로 소스가 묽어져 이게  침인가 싶어 입맛을 잃지 않으려면, 탈수기에는 진심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오늘도 샐러드 한그릇을 비웠다. 나머지 한 끼는 가족들과 함께! 오늘 저녁엔 뭐 먹을까?


#day4 #오늘 먹은 음식 #딱:삔 #야.나.써


10년은 된 것 같은 채소탈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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