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 휴게소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꼭 좀비같다. 안색은 시커매지고 눈밑도 거뭇거뭇, 아기 먹일 젖도 줄었다.
지은 지 25년 된 빌라 3층, 동생 혼자 사는 고향집에 막 도착해 샤워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드르르르륵이었나 두구드그두구였나 드릴이었나 굴삭기였나 그런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 수초에 불과했을 시간이 분단위로 늘어나면서 현실감이 없어졌다. 바닥이 흔들리는데 막 흔들어대는 게 아니라 꿀렁꿀렁 그네나 해먹같은 느낌이랄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벌거벗고 욕실에서 튀어나가서야 옷을 달라고 소리쳤다. 욕실안에 벗어놓은 옷을 까맣게 잊고.
처음 겪었지만 지진이 확실하다고 내기를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털에 검색어를 넣어 봐도 나오는 게 없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선 흔들림을 느꼈다는 제보가 전국에서 쏟아졌다. 경주가 진원지라는 뉴스를 본 게 그 즈음이었을까. 이대로 잘 수 없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집밖으로 나가봤다. 비가 부슬거렸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에 거리는 한산했다. 길 건너편 식당의 손님들도 자리를 지킨 채였다.
그때였다. 장례식장에서 피우는 향 냄새를 맡았다. 그 진동이 영혼을 앗았기에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내 왼편에 서 있던 빌라 건물이, 안 그래도 낡아 벽체에 금이 가 있던 빌라 건물이 내게로 쏟아질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비틀대다 꺾인 무릎에 두 손을 짚었다. 남편은 전봇대가 넘어질 것 같다며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그 순간, 잘 짜인 시나리오처럼 길 건너 식당 뒷문에서 앞치마를 한 아줌마가 튀어나왔고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J가 안에 있어! 데려와야 해!” 소리 지르며 울면서도 발이 바닥에 딱 붙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땅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겨우 빌라 현관 앞으로 갔을 때 겁에 질린 사람들이 겉옷과 지갑, 차키를 들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무리에 아이를 안은 동생이 보였다. 목욕 뒤 기저귀만 차고 있던 아이는 벌거벗은 채였다. 내가 아이를 안고 있는 동안 남편과 동생이 짐을 챙기러 다시 빌라로 올라갔다. 그들이 무사히 나올 때까지 아무 일도 없길 간절히 빌면서도 혹시나 건물이 무너질까 자꾸 뒷걸음질 쳤다. 그러느라 벗은 아이에게 빗방울이 스쳤고 아랫집 아주머니가 가디건을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사람들은 일단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대피요령도, 대피장소도, 그 어떤 대책도, 방법을 말해주는 이도 없었다. 전화도 문자도 먹통이었다. 빗길에 서 있을 수 없어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동네로 차를 몰았다. 시골은 진원지와 더 가까운 곳에 있어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부모님은 괜찮을 거라고, 이제 다 지나갔을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나는 3시간 떨어진 내 집으로 가길 졸랐다. 물론 핀잔만 들었고 추석 연휴 내내 고향에 머물렀다. (지금도 의아하다. 엄마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었을까? 나는 왜 거기서 빠져 나오지 않았을까?)
지나고 나니 두 번째 그것이 본진이었겠다 싶지만 당시엔 더 센 강진이 올 것을, 내내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던 오래된 원전을, 죽어가는 도시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시민들이 제손으로 투표까지 해서 데려온 방폐장을, 곱씹고 곱씹으며 원망하고 두려워하고 다시 안심하고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여진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심장은 밑으로 밑으로 툭툭 떨어졌고 밤이면 아이를 꼭 끼고 누워 오지 않는 아침을 기다렸다.
지진은 멈췄지만 불면이 시작됐다. 눈을 감으면 천장이 무너지는 영상이 자동재생되어 내려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윗집 발소리에 놀라고 의자 끄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춘다. 우리 중에 가장 태연했던 동생도 가위에 눌리고 악몽을 꾸었다. 14층 건물에서 지진이 나 짜부라든 계단을 미끄러져 탈출했다나 뭐라나. 한번은 기차역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기차 들어오는 소리와 진동에 혼자 놀라 비명을 질렀는데, 너무 창피했다고 했다.
후유증이 길다. 2년 뒤, 출장길에 오른 나는 비행기 진동이 무서워 8시간 내내 복도를 서성이다 울었다. 승무원들은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다음 비행에서는 신경안정제를 챙기라고 자기도 그랬다고 조언해주었다. 사무장이 자리로 찾아와 오늘 비행에서 기류가 어떻게 예상되는지 브리핑해주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덜컹, 하면 심장도 덜컹거렸다. 아주 조금은 트라우마가 뭔지 알 것도 같다. 재난으로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에도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려움을 해결할 것은 시간이라 믿었지만 끝난 게 아닌 재난 앞에서는 시간도 겸손해질 밖에. 오늘도 지진이 아닐 뿐 수많은 재난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나는 언제고 내게도 불행이 닥칠 수 있다고 믿는 부류다. 보통은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 잊고 지내지만 잠이 쉬 오지 않는 밤이면 지진이 나던 그날 빌라 욕실 속 나에게로, 히말라야 첩첩산중 숙소에 누워 앓던 나에게로, 인도 어느 마을 내게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에게서 도망치던 때로 돌아간다. 그리곤 소리친다. 어서 벗어나라고. 다행히 불행은 거기까지지만 어디까지 안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
오매불망 언제고 돌아가고 싶던 내 고향, 사랑하는 경주가 두려움의 본진이 된 것이 서글퍼 적어두는 지진의 추억, 아니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