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가 나 잠들 때까지 눈 안 뜨고 있어서 악몽 꿨잖아! 할아버지랑 무서운 데 가는 꿈!
뜨헉. 아이 꿈이 왜 이렇게 사납냐, 꿈 내용에 소스라치기도 잠시. 과연 너 내 딸 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종일 놀다 쓰러져 자는 것이 직업인 꼬맹이가 꿈도 다 기억하고, 짜식!
등 대면 자는 사람들을 제일 부러워하고 잠귀가 얇아 하룻밤에 스무번도 거뜬히 깨며 침대에서 떨어지려는 아이를 잠결에 발로 받아내는 능력을 가진 나는 얕은 잠 속을 유영하며 매일 밤 꿈을 건져 올린다. 잠깐 잠에서 깨었을 때, 좀 더 확실히 깨었을 때, 아침이 되어 완전히 깨었을 때 기억하는 꿈도 다 다르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데 내 꿈은 현실에서 가로막힌 욕망과 잊고 지낸 감정과 스트레스가 한껏 버무러져 있다. 이를테면 스물일곱 살, 첫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해에 꾼 꿈과 해석들을 적어놓은 메모 몇 조각처럼.
1.29 어떤 회사에 지원했는데 사장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였으나 연봉이 짰고, 주6일 근무였고 야근도 많았고 선배로 보이는 사람은 커피를 타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현재 직장에 대한 합리화의 근거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골라'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언저리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인생은 예상 밖의 길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나여야 한다.
3.5 J 오빠와 결혼하는 꿈을 꾸었다. 서로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 계약결혼이어서 오빠는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식 전날, 나는 계속 지금이라도 뒤집자고 주장했다. 늦지 않았다고. 하지만 묵살당했다. 강단있는 꿈속의 나는 내면의 나, 그런 나를 묵살하는 J 오빠는 현실의 내가 아닐까.
3.12 오른쪽 팔을 베고 잤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마비된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다행히 금방 팔을 빼내서 피를 통하게 했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선 그것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의사는 심부전이라는 진단을 내렸다(피 안통하는데 왠 심부전. 외과의사 봉달희를 너무 봤다). 의사가 내게 엄격한 목소리로 "큰 일 날 뻔 했다"고 경고했다(단지 내 팔을 베고 잤을 뿐인데;;). 그 경고가 지금의 내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9.27 추석연휴 끝. 서울 오기 전날 전쟁터에 차출되는 꿈을 꾸었다. 다시 출근해야 한다니. 그곳은 전쟁터니까. 꿈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역시 내 꿈은 현실의 연장.
첫 직장, 이어지는 야근과 말도 안 되는 급여와 더 말문 막히게 하는 주먹구구식 가족경영, 일하는 삶은 왜 이따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고민에 지쳐 선배들과 동기들과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셔대고 낄낄거리고 해장을 하고 기어서라도 다시 출근을 하던 날들이었다. 휴가가 1년에 5일이었던가, 몸이 안 좋아 쉬는 건 외국계 기업만의 문화인 줄 알았던 때. 오전 내내 마셔대던 포카리스웨트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군. 지금에야 스물일곱이 너무 찬란해 당시의 어리둥절하고도 뾰족한 것들까지 둥글게 깎이고 아스라히 빛나지만, 저 꿈들만 보더라도 내가 장하게 이뤘다 생각했던 첫 취업의 꿈은 너무도 시시해져버린, 그만 끝장내고 싶은 무언가였다.
그 후로도 직장을 옮기고 연애 상대도 바뀌었지만 꿈은 계속 꾸었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꿈을 연달아 꿨을 땐 두 번째 직장에서 뛰쳐나올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정기 좋은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신비로운 푸른색의 왕구더기가 꿈 속 우리 집 화단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로또 1등에 당첨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하고 다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는 분이 나와 숫자를 불러주어 그걸 기억하느라 애쓰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아침이 되니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늘 듣던 말은 "야, 개꿈 좀 그만 꿔라"였다.
꿈이 내 현실만큼 비루해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답답해질 때 고혜경 선생의 '나의 꿈 사용법'이라는 강의를 듣게 되었다. 퇴근하자마자 대학로까지 달려가 맨 앞자리를 꿰차고 열심히 받아적었다. 그러니까 무의식의 반영인 꿈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길잡이이며 개꿈은 없다! 꿈은 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기억된다! 그러니까 나는 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 개꿈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선생의 안내에 따라 머리맡에 꿈 노트를 마련해두고 적어본 듯도 하다. 그 강의를 통해 꿈은, 숙면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아니라 무한한 나를 창조하는 어떤 가능성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0년. 또 다른 직장으로 옮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여전히 꿈을 꾼다. 악몽일 때도 있고 너무 스토리가 신박해 자다 깨서 "이거 적어야해...." 하다가 피곤에 까무룩 다시 잠들기도 한다. 꿈에서 이가 빠지거나 엄마가 죽거나 하면 해몽을 찾아본다. "에이, 이거 개꿈이야" 하며 밀쳐내지 않고 왜 이런 꿈을 꿨을까, 발 디딘 곳을 휘휘 둘러본다. 무의식의 바다를 헤엄칠 용기까지는 나지 않기에 그저 발 한 번 담궈보는 기분으로, 그렇게 꿈을 대한다. 오늘은 무슨 꿈을 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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