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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Oct 25. 2021

마지막 아이스 카페라테


지난 주말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셨다. 마시면서 "이게 올해 마지막 아이스네" 되뇌었다. 어떻게 마지막인지 아느냐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던 손이 키오스크의 Hot과 Ice 사이를 배회하는 걸 보았으니까. 왔구나, 완연한 가을. 아이스를 마시면 내장이 얼음찜질한 것 같이 차가워 벌컥벌컥이 아닌 홀짝홀짝 마시다 슬그머니 잔을 내려놓게 되는 늦가을. 다음 늦봄이 올 때까지 아이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걸 지켜보면서 '와, 정말 그때 그 커피가 마지막이었네' 깨닫는 과정을 몇 번 겪고 나면 절로 알게 된다. 이건 짐작의 영역이 아니라 확신의 영역이다.


한 계절 특정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건 괜찮다. 카푸치노, 드립 커피, 이제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차(茶)처럼 뜨겁게 마시면 좋을 것들이 아직 많으니까. 그런데 한 계절이 아니라 인생에서 마지막 아이스 카페라테라고 생각해보면 어쩐지 쓰다.


암수술을 받고 술을 딱 끊어버린 아빠가 떠오른다. 담배를 딱 끊더니 생이 저물어가는 때가 오면 '물담배'를 피우고 싶다던 그도, 육식주의자지만 채식을 선택하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그녀도. 그들에게 마지막 술은, 담배는, 고기는 무슨 맛이었을까. 그것이 마지막인 줄 알았을까. 나의 마지막 커피는, 밥상은, 그것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겪는 순간들은 어떤 모양, 어떤 냄새, 어떤 빛깔일까.


시간의 폭을 점점 좁혀 '오늘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커피를 24시간 마셔도 괜찮은 때가 있었다. 그날만 7잔 째이던 커피를 쭉쭉 빨면서 "난 카페인 영향 없던데?" 하고 말하던 나는, 그냥 젊어서였다. 불면의 날카로운 촉수가 커피 안에 든 카페인을 툭툭 건드려대는 지금의 나는 '어지간하면 오후에는 커피 마시지 않기’라는 방침을 세워두었다. 혹시 저녁에 친구를 카페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시간을 딱 정해두진 않고 '어지간하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둠으로써 느슨하게. 그러다 언젠가 "이제 카페인이 든 음료는 못 마시겠다" 하는 날이 올 것을, 머지않았음을 예감한다.


인생 최고의 커피였던 마끼아또@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커피 세리머니 @에티오피아 바하르다르


더 많은 것을 떠올리다 서글퍼지기 전에 마지막 커피로 한정해본다. 내가 마지막 커피의 순간을 결정할 수 있다면, 에티오피아의 커피 세리머니같이 거창하게 한잔 만들어 마실 테다. 평소에 이벤트라고는 하지 않으니 그것만큼은 근사한 의식처럼 치러봐야지. 사 마시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안 되겠다. 최애 카페가 몇 개나 되니까(나는 왜 이렇게 최애가 많은 걸까? 최고는 둘일 수 없지 않나 반문하겠지만 공동 1위도 있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그중 하나를 고르는 것 따위는 마지막을 앞두고 안 될 일. 그리고 괜히 그 카페로 가서 "이 커피가 제 마지막 커피예요" 하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다.


마지막 원두는 신중하게 골라야지. 인생의 쓴맛을 더욱 맛본 뒤일 테니 묵직하기만 한 원두는 패스. 적당한 산미가 있는 원두로 하겠다. 손목이 지금보다 더 아플 테니 수동 그라인더도 안 될 일. 지금 쓰는 자동 그라인더에 원두를 평소 두 배 양으로 간다. 다만 커피잔만큼은 신중하게 고른다. 가장 좋아하는 잔을 엄선해 뜨거운 물로 미리 데워둔다(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 예쁜 모양으로 얼린 얼음을 미리 채워둔 잔에 초반 원두를 조금 내리고, 잽싸게 드리퍼를 다른 잔에 옮겨 나머지를 내린다. 마지막 '한잔'이라는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지만, 생애 마지막 커피니까 그 정도 관대함은 남겨두기로.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마시고 싶은 커피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날 것의 커피를 다만, 뜨겁고 차갑게 먹는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커피를 만들 땐 온갖 부산을 떨겠지만 마실 때만큼은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쭉쭉 들이켜야지. 아! 그리고 빠뜨려선 안 될 그들, 단골 카페를 공유하고 문 닫을 때까지 눈맞추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집에서 으레 커피를 만들어 나눠 마시던 사랑하는 인생의 커피 동반자들을 모두 초대해 근사한 커피를 대접해야겠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하루 한잔의 커피를 음미해야지. 영어 공부나 하루 한편 글쓰기가 아니라 '하루 한잔 커피 달게 마시기' 따위를 다짐하기 때문에 지금 이 모양인 거겠지만, 어쩐지 이 모양인 내가 좋다. 막 도착한 카톡에 답장하는 일에도, 잠결에 "엄마 죽지 마" 하며 안겨드는 아이를 안아주는 것에도 마음을 조금 더해야지, 그리고 주어진 지금을 만끽해야지. 어쩐지 늦어진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앞에 두고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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