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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Feb 19. 2022

너를 이해하고 싶어

최악의 궁합일지라도


"선배, 이거   해봐."

그날도 업무 스트레스, 상사에 대한 분노를 털어놓으며 "나 회사생활 정말 안 맞는 것 같아" 하고 돌아서는데, P가 카톡으로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유료 성격검사 사이트였다. 검사엔 '한국인 맞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나를 알기 위한 여정에 기꺼이 1만 1천 원을 결제했다. 결과는 다소 갸우뚱했다.

"외향적인 사람, 규범과 위계 중시, 리더 역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음". 대체 누구냐, 넌?

"사회적인 인정과 관심 얻기, 좋은 관계 맺기, 긍정적 태도, 친화력, 충동적, 오지랖, 정, 예의 중시". 어라, 내 얘기 맞는데?

성격검사에서 퇴사의 근거나 용기를 구하진 못했지만 ‘내게 이런 면이 있었지. 맞아, 이래서 다행이다’는 하루치 위안을 얻었다.


"이거 한 번 해봐."

20년 전, 당시 남자친구였던 W가 프린트물을 내밀었다. 심리학에 빠져 있던 공학도의 손에 들린 것은 애니어그램 검사지. Yes/No를 신중하게 저울질하다 소리쳤다. "이거 왜 중간이 없냐.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딱 떨어져!"

애니어그램의 9개 성격유형 중 나는 Helper(조력자)였다. 그는 나의 반대편 위쪽에 있는 Challenger(도전가). 잘 보살피고 친절한 헬퍼와 직선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챌린저의 만남이라니. '이거 쪽집개네?' 속으로만 생각했다. 헬퍼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속이 쓰렸다. 남자친구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애쓰던 스스로가 정말 별로일 때였다.


"선배 남편도 검사 한번 해보라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남편과 다툰 이야기를 하니 이번에는 P가 성격검사 무료 쿠폰을 보내주었다. 공짜 쿠폰 받았다며 K에게 검사를 권했다. "내가 자기 파악 잘 하는 거 알지? 그런데도 여태 몰랐던 부분이 있더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결과는... 뭐지? 내 남편 관찰 보고서인가? "민감하고 풍부한 감수성의 사춘기 소녀 같은 마음, 감정기복, 비사교성, 의존성, 꼼꼼함, 완벽주의적 면모"


'심리검사 결과'라는 타이틀의 권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평소 "왜 저래?" 하고 뜨악했던 부분이 조목조목 설명된 것을 읽으며 "나랑은 진짜 안 맞는 인간"이 "맞춰가며 살 만한 남편"으로 바뀌고 있었다. 퇴근 후 풀코스 뛴 마라토너처럼 지쳐 있거나 문자 하나 보내는 데도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건 관계에 에너지를 무척 소진하는 성격인 까닭이었다.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어 "굉장한 FM"이라고 야유하곤 했는데 그건 자기만의 기준이 명확하고 꼼꼼하기 때문이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들. 어쩌면 그도 덜렁대고 늘 뭔가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나를 견뎌주었겠구나. 그런데도 난 나의 둥글한 성격이 더 ‘낫다’고 여기며 은근히 성격들을 줄 세웠던 게 아닐까.




얼마전 크게 다툰 후 K의 성격검사 결과지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때 잠깐 상대를 이해하는 시늉을 한 우리는 일상이라는 쳇바퀴를 굴리느라 금세 서로의 결을 잊었다. 이번엔 MBTI를 해볼까.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 전까지 TMI가 뭔지도 몰랐던 자다. MBTI 해봤냐고 물으니 역시나 어떻게 하는 거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의 MBTI 유형을 알아내기 위해 나는 기꺼이 검사 사이트를 검색해 열어주고 방법을 일러주고 결과 보는 법도 알려줬다. 그가 툭하면 1%인 내 핸드폰을 충전해주듯이.


정식검사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간이검사였는데, 결과는 ISTJ. 나는 INFP. 그가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평범한 지구인'이라면 나는 '열정적인 중재자', '별에서 온 그대'다. 내향형(I)인 것만 같고 나머지는 다 반대다. 정반대 성격인 걸 굳이 확인하려고 했나 자괴감 들지만, K가 아니었으면 결코 읽어보지 않았을 ISTJ의 특징, 장단점을 읽어보고 이건 맞네, 저건 틀리네 분석도 해본다.


존 페트로첼리라는 사회심리학자가 쓴 <우리가 혹하는 이유>의 부제는 '사회심리학이 조목조목 가르쳐주는 개소리 탐지의 정석'이다. 대표적인 개소리로 지목되는 게 MBTI다. 저자는 MBTI의 기원이 오락용 게임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MBTI 열풍을 보면 과연 그 기원에 닿아 있다. 온갖 것이 MBTI로 설명되고 이해되고 유머 코드로 유통된다. "아니 혈액형 성격을 믿어요? 세상에 사람이 네 부류라는 게?" 했던 나도 MBTI 궁합표를 보고 있으니...


알고 있다. 혈액형 성격이 그랬듯 사람을 16개의 성격 유형으로 나누고 그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는 무성의한지. 그것이 가까운 관계일수록. 하지만 우리는 MBTI 덕에 함께 낄낄대고 이건 틀리네 저건 맞네 하며 상대의 어떤 면모를 화제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아마도 그리고 모쪼록) 평생을 함께할 K를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 MBTI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ISTJ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성정과 자라오며 갖게 된 관념이나 습관 같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사건과 관계 속으로, 더 먼 과거의 이야기들로 걸어들어갈 테지. 성격 말고도 그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대화하고 탐구할 것이다. 그도 나에 대해 그렇게. 그러니까 관계에는, 이미 굳어진 플레이도우 같은 부부라 해도 ‘노오력’이 필요함을 결혼 8년 차에서야 깨달아가고 있다.


하, 그런데 무시할 수가 없네. ISTJ와 INFP의 궁합은 최악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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