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활보 May 07. 2022

디카페인이어도 괜찮아

“킁킁 킁킁”

생각날 때마다 식초병 뚜껑을 열고 코를 박았다. 먼저 코로나와 후유증을 앓았던 회사 동료는 익숙한 냄새를 틈틈이 맡는 게 후각을 되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핸드크림, 비누 냄새 같은 것들. 하지만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조금의 맛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누 따위로는 안 되어 더 강한 냄새를 찾아 코를 자극하곤 했다.


음식을 먹어도 질감이나 온도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간 먹어온 공력에 기대 맛을 상상해가며 먹었다. 내가 무슨 장금이도 아니고 머릿속에 맛지도를 그리며. 쳇, 정말 흥이 안 나는 일이다. 맛을 못 느끼니 굳이 맛있는거 시켜먹을 필요 있나 대충 때우지 싶다가도, 코로나 씩이나 걸렸는데 잘 회복해야지 싶어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었다.


놀랍게도 후각 미각을 잃고 가장 먼저 찾지 않게 된 건 커피였다. 어차피 코로나로 맛도 못 느끼는 데다 두통이나 피곤함 같은 카페인 금단증상은 코로나 증상과 다를 바 없었기에 인생의 3대 재미 중 하나였던 커피가 곧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삶이란 게 그렇다. 최고에서 눈 밖에 나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와 난다 나! 맛이 나!” 딸기가 이토록 신묘하게 새콤달달한 과일이었나. 왜 딸기맛 사탕이랑 젤리랑 아이스크림이 인기 있는지 알겠다. 꽉채운 3주 만에 세상과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걷혔다.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마침 졸업시험도 끝났겠다 남편과 중국집 런치코스를 먹으러 갔다. 코로나 이후 그것도 둘이서만 외식을 한 게 첨이니까 2년 만인가. 중국집 옆 자주 가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호기롭게 아이스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3주간 고생했다! 커피 너 오랜만이다! 술이나 담배도 아니고, 끊을 생각이 없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3주 만에 커피를 마신 그날 밤, 심장이 나대었다. 심장 뛰는 설레는 그 느낌 어쩌고 하며 글을 쓴 나의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을 만큼 불쾌했다. 낯익은 기분. 지진 트라우마가 공황 증세로 나를 덮친 날 알게 된 어찌할 바 모를 그 느낌적 느낌. 심장 뜀을 공황으로 인지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공황이 와서 심장이 뛴 건지 선후관계를 알 수 없지만 깊은 심호흡을 하며 잠을 청했다.

이후 카페인 든 커피를 (거의) 끊었다(‘거의’가 된 건 이 글을 쓰는 오늘 한잔 마셨기 때문이다). 집에서 드립해 마시는 원두로 디카페인을 사고, 카누 더블샷라떼를 대신해 카누 디카페인 라떼를 샀다(그 와중에 카누 디카페인은 왜 ‘더블샷’이 없나 투덜대며). 디카페인 커피로의 안착이 스무스하진 않았다. 20년 넘게 커피를 달고 살았기에 디카페인 원두의 미묘하게 다른, 약간은 화학성분 같은 맛 때문이었다. 로스러리 카페 곳곳을 들러 시켜먹어 봐도 그 맛이 거슬렸다. 그러다 최근 한 카페에서 괜찮은 디카페인 라테를 발견했다.이쯤 되니 그냥 디카페인 원두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커피를 물처럼 마시다 하루 한잔 오전에만 마시다 이제 그마저도 디카페인만 마시는 신세지만 어쩐지 싫지 않다. “디카페인 발명한 사람 상 줘야 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영 후 그 맛난 디카페인 라테를 파는 카페로 자전거 패달을 밟을 때면 속도 없지, 막 신이 난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원슈의 ‘존재만으로’ 가 흘러나오고. 하, 좀 멋진데. “이제 뭘 못하게 된 신세”라는 한탄 대신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아이스도 아직은 거뜬하고.” 안도하는 내가 좋다.


노화감정은 노인 세대에만 있는 게 아님을, 갑작스럽게 돌아온 미각처럼 깨닫고 있다. 여전히 젊은 정신과 그를 따라잡지 못하는 몸과 마음이 끈 떨어진 인형극 인형처럼 덜렁거려 그 셋 사이를 이어 붙이는 데 에너지를 쓰는 나날들이지만, 어쩐지 괜찮고 나는 안온하다. 그러면 그런 대로 잘 늙어가는 기분이 들고 스스로가 대견해져 디카페인 커피를 다디 달게 호로록 마셔보는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를 이해하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