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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n 23. 2024

사랑이었던 당연한 것들

무더위가 시작되자 회사 주변 유명 콩국수 집 앞엔 긴 줄이 늘어섰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식당 건물을 빙 둘러 감쌀 정도다. 정수리가 뜨겁고 살을 바싹 태워버릴 것 같은 뙤약볕에 양산도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콩국수를 먹기 전에 더위를 먼저 먹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남짓의 점심시간에 과연 저 사람들이 밥을 먹고 회사에 복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가운데 중간중간 젊은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 평일에 데이트를 온 젊은 커플... 휴가이거나 취준생이거나 이제 갓 여름방학을 시작한 대학생 커플이려나?


“저 고생하면서 꼭 저걸 먹어야 되나?”

“아마 이 주변에 데이트하러 왔는데 맛집 찾아보니 여기가 유명하다고 뜨니 온 거 아닐까요? 여길 또 언제 오겠어! 하면서 제일 유명한 것으로 먹어야 하니까 ㅋㅋㅋ”

“근데 과장님은 놀러 갔을 때 꼭 유명 맛집 가봐야 하는 사람이야? 어때?”

“아니요. 저 정도 줄이면 바로 다른 데 갔죠. 근데 젊었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어릴 때 연애할 때야 에너지가 있으니까 저런 것도 별로 안 힘들었던 것 같아. 지금이라면 절대 못 하지”

“와 근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제 전 남친은 저랑 나이 차이도 많이 났는데 그거 맞춰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ㅋㅋㅋㅋㅋ”


갑자기 왜 뚱딴지같이 전 남친 생각이 났을까? 아마 그 긴 줄에 서 있는 커플들 중 한 명은 그냥 주변 아무 식당에 가서 고픈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굳이 그 땡볕에 웨이팅을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다는 것이니까 좋은 마음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사랑으로.




전 남자 친구와는 7살 차이가 났다. 내가 20대 후반일 때, 그는 이미 30대 후반에 들어섰었다. 만날 땐 별로 못 느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는 '르망'(대우에서 나온 자동차로 90년대 유명 소형 세단)으로 운전면허를 땄었다니 징그러울 만큼 엄청난 세월의 격차가 느껴진다. 


불현듯 떠오르는 그와의 기억들이 있다. 석촌호수 벚꽃이 보고 싶었던 나와 '굳이 그런 걸 보러 사람 많은데 가야 하냐'는 그 사람. 지금의 나 같으면 절대 엄두도 나지 않아서 가지 않았을 석촌호수 벚꽃축제. 그 많은 인파가 한 방향으로 좀비 떼처럼 걷는데 꽃을 보러 온 건지, 사람을 보러 간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한껏 들뜬 나와 피곤과 짜증이 배어 있던 그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래도 그곳에 같이 가주었구나.


아! 심지어 싸이 흠뻑쇼에도 갔었다. 한여름에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했는데 입장하기 위해서 1시간 반 전부터 줄을 섰었고, 기억으로는 관중이 3만 명이라고 했었는데 입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 스탠딩 구역으로 예매했었다. 영원히 시작하지 않을 것만 같은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세 번째 곡이 끝났을 때, 남자 친구는 힘들다며 집에 가자고 했다.

“이제 시작인데 가자고?”

하지만 연이어 나온 신나는 음악에 사람들은 굿하는 무당처럼 동시에 박자에 맞춰 펄펄 뛰기 시작했고 그렇게 4시간이 흘러갔다. 콘서트에서 뿌려대던 물에 콘서트 제목대로 온몸이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고, 운동화에서도 물이 찌꺽찌꺽 나왔다. 한여름에 무려 6시간을 어디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하고 선 채로 펄펄 뛰고, 물에 젖고… 이제야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난다. 30대 후반의 내가 애인이 가고 싶다고 싸이 콘서트에 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가자고 해도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절대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니면 갔다가 며칠을 앓아누웠거나.


크리스마스에 명동에 갔던 것, '~ day'가 붙는 의미 없는 기념일에 가기 힘든 식당에 예약해서 간다거나, 온통 여자뿐인 손발 오그라드는 감성 카페에 가거나, 그는 그리 좋아하지 않던 조개구이, 곱창을 먹으러 갔던 것, 사람이 넘쳐났던 여의도 세계 불꽃축제에서 돗자리를 펴고 불꽃을 어떻게든 보겠다고 기다렸던 그날, 백화점을 백 바퀴를 돌며 뭘 살지는 모르지만 일단 돌아보는 쇼핑을 함께했던 그 순간들이 다 사랑이었네.




사랑이고 배려였다. 그때는 당연한 줄만 알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순간도 있었는데 긴 시간이 흘러 그의 나이를 훌쩍 넘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때 그런 마음을 알았더라면 ‘고맙다’는 말을 꼭 해줬을 텐데. 그런 배려와 사랑을 당연히 느끼는 나에게 서운함이 쌓이면서 우리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갔던 거겠지? '고. 마. 워' 그 세글자가 뭐가 그리 어렵다고... 쓸데없이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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