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디자인 업계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by 나무기린

퇴사한 지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매서운 한파와 폭설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전기요를 깐 푹신한 침대 위 두툼한 이불속에서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유튜브 세상을 누비고 있었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 때면 베일듯한 찬 바람에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다 이런 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회복하는 갓난아기처럼 나는 그런 겨울을 보내고 있다.




퇴사를 앞뒀을 땐, 매 순간 숨 막히던 이 지옥을 하루빨리 탈출하는 것뿐 원대한 계획 따윈 없었다. '참으면 병 된다'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고, 불안을 줄이는 치료를 받으러 일주일에 2번 병원만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 항불안제를 복용하면서 카페인과 알코올에 민감해져 내 삶의 유일한 낙인 커피와 술을 못 마시게 됐다.


디카페인 커피만 마시고 있는데 어쩌다 없는 카페를 가게 되어 오랜만에 그냥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다. 아… 그 깊고 진한 짜릿함이란! 하지만 그 짧은 희열과 불면의 밤을 맞바꿔야 했다.


얼마 전엔 정말 오랜만에 생맥주 몇 잔을 마셨다. 일 년에 한 번 겨우 만나는 친구라서 그런지,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취하지도 않았는데 역시 날이 밝도록 한숨도 못 잤다. 그 여파로 며칠 동안 수면과 기상 시간이 엉망이 되었다. 무리가 갔는지 몸살이 난 듯 아프고, 임파선이 부었다가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혹시 독감이 걸렸을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이제는 커피도 맥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제약이 생겨버렸다.


지긋지긋했던 인간들과 속 터지던 일들도 이제야 겨우 흐릿해졌다. 게으른 일상을 보내며 또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넉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직을 위한 준비는 고작 이력서 업데이트뿐.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언제 할 것이며, 피그마는 언제 익힐지 매일 마음의 짐이 나를 짓누른다. 막상 하면 별것도 아닌 것을 더럽게 질질 끈다.


같이 퇴사했던 동료는 공백없이 바로 이직을 했다. 금융권이라는 폐쇄적인 환경 때문에 주로 구형 버전 포토샵으로 작업했었는데, 이직한 곳에서는 피그마만 사용해서 자기가 경단녀가 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디자인 업계도 급변하고 있고 디자이너들이 다뤄야 할 것이 더 많아졌다. 메인 툴도 옮겨가고, 다뤄야 하는 것도 많아지고, 업무 시스템도 바뀌고…


나이는 들어가고, 경력은 늘었는데 요즘 날고 기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두려움부터 앞선다. 다른 디자이너들의 글을 볼 때면 앞서가는 정보들이 넘쳐나고 정답인 듯한 당당한 목소리들에 주눅이 든다. 나는 솔직히 두렵다. 실전에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움츠러든다. 이럴 땐 아는 게 병이다.




퇴사 초반에는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은 외출을 하려고 애썼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나간다. 오늘은 창밖을 보니 봄볕 같은 느낌이 들어 나를 겨우 설득해 카페에 나갔다. 두 달이 넘도록 활동을 별로 하지 않았더니 15분 정도 걸었는데도 힘이 들었다. 아이패드, 다이어리 싸 짊어지고 카페에 왔건만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지난주엔 합정동에 있는 대형 서점에 들렀다. 홍대가 가까워서 그런지 디자인 서적들과 미술용품이 다른 곳보다 많은 것 같았다. 서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슬퍼졌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해오면서 서점은 항상 즐거운 공간이었다.


갖가지 책 표지들이 눈을 즐겁게 하고, 정제된 타이포그래피가 주는 희열. 미술용품 코너에 있는 색색의 종이와 펜들을 보면 기분이 들뜨고, 디자인 서적들을 들춰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주 오래전 신사동 가로수길 초입에 디자인 서적을 파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 신사동에 갈 때면 꼭 그 서점에 들러 이책 저책 들춰보며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스쳐 갔다.


하지만 그날 서점에서의 나는... 아무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멋진 표지를 봐도, 화려하거나 절제된 그래픽을 봐도 아무 느낌도 없었다. 나도 저렇게 해봐야겠다는 자극도 생기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종이들을 봐도 두근거리지 않는 심장처럼 내 열정도 빛이 바랜 걸까? 나 다시 디자인 업계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복용하고 있는 약 중에 심장박동을 안정시키는 약이 있다. 일단은 약 때문인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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