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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7개월

by 나무기린

얼마 전 영화 '미션 임파서블' 마지막 시리즈가 개봉했다. 자고로 백수의 장점이란 붐비지 않을 때 갈 수 있다는 것! 아주 여유 있게 IMAX관 좋은 자리를 예매했다.


기대감에 부푼 오랜만의 나들이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쇼핑몰에 들어서자마자 조금씩 어지러움이 시작됐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긴 심호흡을 계속 내뱉어야 했다.


300석이 넘는 자리 중 하필 재수 없게 옆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인지 불륜인지 모를 아줌마, 아저씨)의 아그작 먹는 팝콘 소리와 자기 집 안방처럼 떠드는 소리에 관람을 방해받으니, 신경이 쓰여 더 숨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영화 보고, 서점에 들러 책도 고르고, 저녁도 먹고 올 나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겨우 집에 돌아와 일찍 뻗어버리고 말았다.


영화 속 톰 크루즈는 ‘정말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 같았다.

목숨이 여러 개 되는 사람처럼 바닷속을 누비고, 하늘에서 펼치는 액션은 입이 떡 벌어졌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저게 가능해?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텐데.... 저 사람 노력의 1%만 해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한 편을 겨우 보고 돌아와 파김치가 된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껌뻑거리고만 있었다.




퇴사한 지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그간 단풍이 지고, 꼼짝도 하기 싫던 겨울, 황홀한 봄을 지나 얼마 전 에어컨을 켰다.


여전히 불안장애 약을 복용하고 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아침, 저녁, 취침 전 이렇게 하루 세 번, 28일 치 약 보따리를 받아 들면 왠지 모를 현타가 몰려온다.


항불안제 때문인지 카페인과 알코올에 민감해졌다. 삶의 낙이었던 커피와 술을 한 잔도 맘 편히 마실 수 없게 되어 가뜩이나 심심한 일상이 더 재미가 없다.


지난달에는 예후가 좋아져 항불안제 처방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 안일하게 치맥도 하고 디카페인이 아닌 커피를 마셨다가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우고 3주가 넘도록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율신경계에 가장 중요한 것이 수면인데....

다 내 탓이다.


약이 줄어드니 예민해져서 쉽게 짜증이 난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오를 때가 있다. 입맛도 없어서 밥도 제대로 안 먹는데 그렇다고 살도 안 빠진다.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밥도 거르며 엉망진창으로 보내고 있다.


퇴사할 때야 그 답답한 인간들을 안 봐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이제 반년이 넘어가니 하나둘 걱정이 앞선다. 허송세월했던 과거의 잘못을 또다시 반복할까 봐 불안해진다.


남들은 퇴사하면서 해외여행이다 뭐다 계획을 세우던데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발뒤꿈치만 봐도 소름 돋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인간들을 내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고, 숨 막히는 지옥철을 더이상 타고 싶지 않았다.




난 지난 7개월 동안 뭘 했나.


연초엔 신경과에 일주일에 2~3번 방문하며 집중 치료를 받았다.

치아교정 때문에 3~4주에 한 번씩 치과에 다녔다.

가족들과 강릉, 속초 여행을 갔다.

한적한 평일에 에버랜드에 가서 정말 보고 싶었던 판다 가족 러바오, 아이바오, 루이바오, 후이바오, 강바오님까지 봤다.

평일 런치 시간에 널널하게 아웃백에 갔다. 남들 일하는 시간에 한가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으니 더 좋았다.

몇 년 만에 인왕산을 등산했다. 쉬운 코스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상이 가까워지니 새삼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산해서 먹은 해물파전과 막걸리는 아주 꿀맛이었다.

옥천암에서 시작하는 북한산 자락길을 걸었다. 계단이 하나도 없는 길이라 자연을 즐기기 좋았다.

안산 자락길을 걸으며 단풍을 즐겼다.

평일 낮. 카페에서 책도 읽고, 글도 썼다.

몇 번 필사를 했다.

가보고 싶었던 유명한 굴보쌈 집에 갔다. 오후 4시에 갔더니 웨이팅을 전혀 안 해서 행복했다.

김포 현대 아울렛과 일산 호수 공원에 처음 가보았다. 물욕이 없어서 그런지 사고 싶은 게 전혀 없었다.

반가운 얼굴들과 강화도 캠핑장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목이 아프도록 수다를 떨었다.

친구가 인천 조양방직에 데려가 주었다. 색다른 공간을 구경하고 인생 까눌레를 만났다.

나름 고급 오두막을 예약해 바비큐를 해 먹고 불멍을 했다. 친구가 정성껏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주었다. 대학 시절 내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합정동에 있는 멕시칸 음식점에 갔다. 알고 보니 줄까지 서는 맛집이었다.

3년 만에 튤립을 샀다. 튤립이 피어있던 일주일 동안 행복했다.

옥천 부소담악에 가서 샛노란 개나리길을 걸었다.

생일에 조카들에게 감동적인 편지를 받았다.

유명한 벚꽃 스팟인 정독도서관에 가서 만개한 벚꽃을 보았다. 언제나 아쉽기만 한 봄이다.

서울식물원을 산책하며 알록달록 튤립을 즐겼다.

가족들과 순천 여행을 갔다. 볼거리, 푸짐하고 맛깔스러운 먹을거리! 모두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싼 맛에 갔던 아주 지저분한 숙소는 빼고)

친구와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며 압구정에 있는 한우 오마카세에 가보았다.

미루고 미루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첫 영상을 올려보았다.




내 불안의 원천을 알고 있다. 취업 준비는 뒷전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처럼 관성이 시작되어 움직이기 힘들어지면 어쩌나'하는 생각과 함께...


답답한 마음에 챗GPT에게 걱정을 털어놓아 보았다. 나는 왜 항상 이직까지 한참이 걸리는지 말이다. 돌아온 대답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내 기질상 회사에 속해서 살아가기 힘든 사람인데 진정 생계 수단으로만 그 일을 버텼기 때문에 돌아온 반작용이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억지로 버틴 결과'라고 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의문이 든다. 회사를 다니고 싶어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돈과 삶을 맞바꾸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난 그게 싫다. 죽을 때까지 끝없이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지옥.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닐 텐데 그 세상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 말이다. 아! 그래서 어른들이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보는구나.


잠이 오지 않는 깜깜한 밤은 새삼스레 내가 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돌아보게 했다. 첫 직장에서 디자인 업계에 실망을 느낀 나는 다시 디자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운 것이 이것이니 그나마 빨리 먹고 살 것은 디자인이 었고, 주변 친구들을 보니 모두 웹디자이너가 되어있었다. ‘남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어?’하며 들어선 길이었다.


그렇게 18년이 지났다. 디자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그려지지 않고 어느 정도 만족감도 있지만 나에게 더 딱 들어맞는 옷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펼친다.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답도 없는 상상만 한다.


아이언맨처럼 나에게 딱 들어맞는 옷을 입고 훨훨 날아올라 바쁘게 내 삶과 일이 혼연일체 되게 사는 것은 환상 속의 일일까? 어차피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밀도 있게 살려면 일이라도 신나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산다면 내 시간을 돈과 맞바꾼다는 생각은 더는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매일 시간을 낭비하는 모순적인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희망을 품고 글쓰기도 시작했던 것인데 요즘은 흥미도 잃어 이렇게 한 달에 한 편 겨우 게재할까 말까 한 상황이다. 40대 초반이니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는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답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너무 비관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이젠 안다.


얼마 전 ‘미지의 서울’이라는 드라마의 인상적인 클립을 보았다. 3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집에만 갇혀 지낸 주인공 미지가 ‘아무것도 못 하겠고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다’라고 하자 미지의 할머니가 한 말은 마치 나에게 하는 것 같아 오열하고 말았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냥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그래, 나는 오늘도 용감한 하루를 보냈다. 조바심은 지우고 힘 빼고 가다 보면 언젠가 길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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