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1년 전부터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었다.
'연말이니까 내년 초에 나가야지.'
'좀 있으면 설 연휴니까.'
'2월은 짧으니까 어영부영 지나가네'
'5월엔 연휴가 많으니까.'
'여름휴가 갔다 오면.'
'이번 추석 연휴가 기네.'
'10월 연휴 지나면 나가야겠다.'
그래서 그게 지금이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해방이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입사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완벽한 물경력을 제공해 줄 곳이라는 것을.
대기업 사이트 운영 디자인 파견 일이었다. 면접 때 듣기로는 사람들이 좀 개인적이지만 착하고,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마흔이 넘으면 디자이너로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작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기 괜찮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첫 출근 날, 1층 로비에서 만난 PM은 정말 삶의 의욕이라고는 1도 없는 무기력한 얼굴과 덥수룩한 머리로 나를 인솔하러 나왔다. 사무실은 4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 환기구도 창문도 없는 밀실. 각자 벽을 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PM은 나를 소개했고, 나는 틀에 박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앉아 있던 3명의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인사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에 열중했다. 뻘쭘했다.
사무실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일이 없다고 하더니 키보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백수였다가 갑자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배에서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천둥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색한 사람들과 숨 막히는 적막.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컴퓨터 보안, 권한 신청 등 과정이 많아 거의 3일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 것 반나절도 안 걸렸는데...
인수인계를 받아보니 이미 해오던 일이었기에 적응이랄 것이 없었다. 다들 6년 이상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일이 없는 프로젝트에 고급 인력 5명을 넣어놨다고? 이렇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직에 그렇게 주눅 들어 하지 않았을 텐데...
모든 업무 환경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던 2015년에 멈춰 있었다.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10년 된 24인치 싸구려 모니터는 아무리 밝게 해도 밝아지지 않았다.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색상 값도 제대로 확인이 안 되는 모니터를 주다니. (낼모레 칠십인 우리 아빠도 이런 모니터 안 쓴다) 책상은 세로 폭이 3뼘도 되지 않는 간이 테이블이라 모니터가 얼굴 앞에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갖춰놓은 데스크 환경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집에서 놀고 있는 27인치 iMac과 50만 원 넘는 Dell 모니터를 가져오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나중에 업무에 필요해 Mac을 본사에 요청하자, 2014년 Mac mini를 보내줬는데 워낙 오래돼서 최신 소프트웨어 버전으로 업데이트도 할 수가 없었다. 연장 탓을 할 수 없는 법이지만 참 모양 빠졌다.
작업 프로그램도 요즘 업계에서는 ‘sketch’도 지나갔고, ‘Figma’로 작업한다는 마당에 포토샵 CC 2015년 버전을 쓰고 있었다. 작업을 하다가 간혹 ‘아, 옛날 꺼라 이 기능이 안 되는구나’하며 짧은 길을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까...
업무 난이도는 초, 중급 인력이면 충분한 업무들이었다. 기업에서 돈을 주고 운영업체를 고용했을 때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고급 이상의 인력으로 요청했을 것이다. 마흔 넘은 내가 이 팀의 막내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경력에 따라 초급/중급/고급/특급으로 나뉜다. 상세 기준을 빼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 초급: 6년 차 미만
- 중급: 6년 차 이상
- 고급: 9년 차 이상
- 특급: 12년 차 이상
첫 회식의 기억은 아주 강렬하다. 다들 술도 안 먹고, 회식을 달가워하지 않아 점심에 하게 되었다. 서로 말도 없이, 각자 코 박고 밥만 먹었더니 20분 만에 연말 회식이 끝났다. 체할 뻔했다. 긴 시간 같이 있었다던데,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밥을 먹었어도 그거보단 나았을 것 같다.
일이 별로 없으니 핸드폰 게임이나 하고 드라마 보고, 심지어 PM이 코를 드르렁 골며 낮잠을 자는 이상한 곳. 누군가에겐 천국이려나?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난 절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 에세이 쓰기 수업에 다녔다.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제출해야 해서 일이 없는 틈에 과제를 했다. 그 수업에서 만난 인연으로 우연히 글쓰기 모임에 참여해 1년 동안 2주에 한편씩 글을 썼다. 단편소설과 필사 수업도 수강하며 글쓰기에 열중했다. 에세이 공모전에 참가하기도 하고, 에세이 수업에서 완성한 글들을 모아 브런치 작가도 될 수 있었다. 나름 처음 계획대로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서서히 나도 검어지고 있었다. 점점 당연하듯 핸드폰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발전적인 일들을 미루기 시작했다. 작가로 살고 싶은 목표도 흐릿해졌다. 글을 쓰며 살고 싶은데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이런저런 수업을 들어봤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글밥을 먹고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열정도 한풀 꺾였다.
가장 심각한 손해는 나의 직업관이 흔들린 것이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아무리 작은 건이어도, 매달 반복되는 재미없는 기획에도 최선을 찾고, 색다르게 표현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료와 시안을 하나씩 제작해 제출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시안이 안되면 좋겠다. 되면 배너 만들어야 하는데 귀찮아.’
나의 뿌리가 흔들린 것 같아 슬펐다. 올해가 되며 가뜩이나 없던 디자인 업무가 더 줄었다. 경기가 안 좋다더니 마케팅비를 줄였나 보다. 디자인 업무를 할 기회조차도 줄었다.
수년간 여러 곳에서 운영 디자인 일을 하면서 나름 애착을 갖고 일해왔다. 현업 담당자보다 내가 더 사이트에 대해 잘 알고, 현업이 놓친 것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전문가인 우리가 할 일이라 여기며 임해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페이지를 눌러보다가 오류가 난 화면을 발견해 곧바로 PM에게 알렸다. 이건 사고니까 빨리 고쳐야 하는 것이 맞으니, 말한 것인데 기획자이자 PM의 반응은 황당했다. 자기를 지적했다고 생각했다. 비꼬는 말투로 삐죽거리며 하는 혼잣말을 들었다.
"오류나면 뭐 어때"
이런 경험을 몇 번 더 하고 나니 나도 손을 놓게 되었다.
‘사고 나든 말든 저 사람 책임이지. 알아서 해라.‘
잘못된 요청이 와도 “우리는 시키는 일만 하면 돼요.”라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방면으로 퇴보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감도 점점 사라져갔다. 내가 2015년 환경에 머물러 있는 동안 포토샵은 생성형 AI가 탑재되었고, Figma로 작업 툴이 옮겨가고, Chat GPT와 미드저니를 활용한 이미지까지 실무에 활용되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 중이다. 이렇게 더 있다간 디자이너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이직을 할 수 없어서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나는 20, 30대에 허송세월을 보낸 과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이곳에 있었던 건 오로지 돈. 돈 때문이었다. 나는 관성이 심한 사람이라 직장을 구하지 않고 퇴사하면 또 예전처럼 1년 이상 눌러앉아 재산을 탕진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매일 버티라 했다. 40대가 돼서까지 그 실수를 반복한다면 더 이상 내 인생은 회복 불가다.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과 악마 같은 무기력한 편안함에 젖어 들어갔다. 하루빨리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사무실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가 답답해서 오후엔 잠깐씩 동료와 산책을 했다. 산책코스엔 나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을 선사해 준 신문사 앞도 포함되어 있다. 공모전에서 큰 상을 타고, 인터뷰도 하고, 신문에 나고, 국제광고제에 가고… 우리나라의 광고계의 획을 그을 광고인을 꿈꿨던 대학생인 내가 꽃다발을 들고 패기 어린 표정으로 서 있던 계단 앞을 지난다. 당시 인터뷰를 하러 왔다가 담당자분이 데려가 주셨던 오래된 중국집이 얼마 전 폐업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땐 꿈에도 몰랐지. 20년 후에 이렇게 무기력한 디자이너가 되어 매일 이 앞을 지나칠 것을.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 메일함을 확인한다. 아무 업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 오고, 자리를 정리하면 퇴근할 시간이다. 붐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나도 모르게 뱉어지는 한마디.
“아오... 지겨워”
작년에 PM이 바뀐 후, 분란까지 많이 생겨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사무실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지내고 있다. 그것이 그나마 함께 일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업무에 수동적이고, 모든 문제에 회피적인 사람들. 그리고 자잘한 감정적인 문제들이 곪아 썩어갔다. 1분 1초가 지옥 같았다. 12월이면 계약 종료이지만 그때까지 있다가는 심각한 병에 걸릴 것 같았다.
난 결국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3개월 동안 약을 먹어도 자주 숨 쉬는 것이 답답하다고 하니 뇌파검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했다. 결과는 색깔로 표시되는데 정상이면 연두색이라고 했다. 내 검사 화면엔 온통 최고치인 붉은색이었다. 심지어 검사받은 날은 잠도 잘 자고, 컨디션과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그 정도였으니 회사에선 도대체 어떤 상태란 말인가?
퇴사 의사를 밝히려 연락을 하니 면담 한번 없이 본사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내가 불안, 공황 때문에 더는 다닐 수 없겠다고 하니 퇴사는 간단하게 일단락되었다. 본사에 이곳의 심각한 상황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차피 관심 없을 것이 뻔하다. 전부터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 인력 업체처럼 그저 급에 맞는 인력을 구성해 파견 보내고 운영비만 받으면 그만일 텐데... 멍청한 생각이었다. 말해봐야 내 한풀이 밖에 안될 것이다.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진흙 구덩이에서 나가면 되고, 이곳은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온통 붉게 물들어 있던 뇌파 검사 결과를 보고 나는 바로 이직하지 않고 두세 달 쉬기로 했다. 그 결정만으로도 마음이 편하다. 그 뒤의 일은 정상 수치인 연두색 결과지를 받은 후에 생각해 보려 한다.
잘 벌고 갑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