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의 글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뜸했지요? 그동안 가을은 느낄 틈도 없이 지나가고 요란한 첫눈까지 내렸네요.
자발적 백수인 저는 고향집에 2주 동안 내려갔다 왔어요. 서울 집에서는 혼자 너무 지긋지긋하게 심심하고 외로웠거든요. 그렇다고 나가고 싶지도 않고, 무기력이 덕지덕지 저를 잡아끌더군요.
그래서 만만한 도피처인 고향집으로 갔지요. 사람의 온기가 있고, 가족들이 있고, 엄마 밥이 있는 곳으로요.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길 반복하고 있네요. 그랬더니 고향집마저도 금방 지겨워지더라고요.
저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구는 시집 못 가고, 돈도 못 버는 애물단지 노처녀로 지냈습니다.
12월이 되면서 부모님은 벌써 몇몇 연말 모임에 다녀오셨는데, 그 나이대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자식 자랑 아니면 손주 자랑이지 않겠어요? 모임에 다녀온 엄마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더 잔뜩 날카로워질 뿐이었습니다. 누구네 딸이 결혼했네… 누구 자식이 어딜 들어갔다더라… 뻔한 이야기들.
“엄마는 할 얘기 없어서 좀 그랬겠네?”
“그렇지 뭐”
‘그렇지 뭐??????’
내심 다른 답이 돌아오길 바라고 했던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같은 거요.
'그렇지 뭐'라는 한마디가 어찌나 상처가 되던지 마음속엔 수천, 수만 개의 가시가 돋아난 것 같았어요.
‘나는 다른 부모랑 당신을 비교한 적 없는데 그런 말을 해?’
미웠습니다. 제 마음속엔 인정 한줄기 피어오를 틈조차 없었습니다.
2달 정도 알 수 없는 입안 화끈거림으로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요. 종일 치약을 물고 있는 것처럼 화한데 밤이면 화끈거림이 더 심해집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병원 투어를 하고 있습니다. 이비인후과, 신경과, 치과…
치아 교정이 끝나면서 이러저러한 치과 처치로 입안이 스트레스받아서 그런가, 치약을 바꿔서 그런가, 아니면 길게 먹었던 항불안제를 안먹게 되면서 생긴 증상인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모두 가서 물어봐야만 확실해질 테니까요.
답답하고 지칩니다. 종일 입안이 불편하니 평안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대체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 아득합니다.
복합적인 영향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긴 호르몬 변화나, 항불안제를 끊으면서 생긴 구강 건조증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요 몇 달 생리가 줄어들고 불규칙해지는 것 보면 폐경이 멀지 않았구나 싶어지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져버린다고 생각하니 슬퍼집니다.
본가 거실 한가운데 소파 앞 이부자리가 저의 잠자리입니다. 온 가족이 잠든 밤에 휑한 거실에 덩그러니 누워있다 보면 깜깜한 생각들이 몰려옵니다. 그런 밤 있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다 망한 것 같은 밤.
‘내 앞날이 뭐가 나아지긴 하는 거야? 지금처럼 혼자가 지겨워질 때쯤 고향집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여생을 보내는 거 아닐까?’
내 삶은 내가 바꾸는 것인데 하고 싶은 것도, 아무 의욕도 없으니 어떤 시작도 엄두가 나지 않아 우두커니 서서 시간만 죽이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부모님이 아프시기라도 해서 큰돈이 필요하다면, 또는 부모님 생활비를 드려야 한다면 내가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무탈함에 감사하다.’라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밤이 반복됩니다.
날이 밝고 나면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유튜브나 보다가 밤이 되거나, 외출을 한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서 돌고 도는 외식 선택지 중의 한 곳을 가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작년에 아빠가 엄마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준 가방의 금속 고리 장식이 부러져서 A/S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별일도 아니지만 매일이 지겹도록 똑같았던 저에겐 그야말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새로운 일투성이였으니까요.
일단 그 브랜드 매장이 중소 도시인 저의 고향에는 없었습니다. 인근 대도시에 있는 아울렛에 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1년 무상 보증기간이 단 하루 남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아울렛으로 향하는데 신이 났습니다. 저 자신도 느낄 만큼 들뜬 목소리로 조잘조잘 떠들었습니다. 엄마가 A/S를 맡기며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매장 안에 있는 가방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명품 가방을 못 사서 난리라는데 저는 노트북이나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가 더 좋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동생 겨울옷도 사고,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데 첫눈이 펑펑 내려 조심히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자극들에 재밌는 하루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떻게 알고 명품 가방 콘텐츠 영상들을 추천해 댔습니다. 처음엔 이름도 생소한 것투성이더니만 보다 보니 갖고 싶은 가방이 생겼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그동안 샀던 싸구려 가방들의 디자인이 그 브랜드 스타일을 따라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까 매장 안 거대한 거울에 비친 초라한 내가 자꾸 생각납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잔머리가 자꾸 튀어나오고 꾀죄죄해 보이던지... 매일 밤 자존감의 바닥을 긁고 있을 거면 이런 방식으로라도 자존감을 돈 주고 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에게 으스대려고 사는 것 말고, 내 분에 넘쳐 모시고 다닐 그런 것 말고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내 취향이 담긴 양품이면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푸대접인 나 자신에게 귀하게 대접 좀 해줘야겠어요.
돈도 안 벌면서 무슨 명품 백을 사겠다고 떠드는지… 정말로 대책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근데 인생 이러나저러나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 주식 투자가 좀 잘되어가고 있으니 투자 목표 금액을 달성한다면 그땐 하나 사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과연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이지만요.
이렇게 또 대책 없는 하루가 흘러갑니다. 그래도 뭐라도 욕구라는 것이 생겼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