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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20. 2022

네 번째 마디

막막함과 공허감으로 시작됐던 마흔도 어느덧 몇 달 남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몇 살이냐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마흔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20대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저주처럼 느껴졌고, 30대는 궤도를 자꾸만 이탈해 버렸다. 마흔이 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많은 가능성은 자연스레 사라져버렸고, 그래도 한가지 직업을 쭉 해온 덕에 나름 만족스러운 보수를 받으며 일상의 평화를 찾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웠을 때는 사십춘기라고 칭한 마흔 직전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이때쯤은 이루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걸 신랄하게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동안 미루던 것들을 실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마치 대나무의 마디들처럼, 그때의 혼돈들이 나의 마디를 만들고 다음 스텝을 시작할 수 있는 채찍이 되었다.


“기린! 너 글 써봐!”

“글?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아니야. 너는 표현하는 게 남다르다니까. 글 써봐 글.”


나를 기린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웹 에이전시에서 함께 산전수전을 겪었던 전우 같은 친구다. 호프집에서 먹태를 씹으며 맥주를 한잔하다 친구가 건넨 말이었다. 그 후에도 친구는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마음속 깊숙이 품긴 했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본 적 없는 꿈을 들킨 것만 같아서 뜨끔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변 몇 명의 지인들도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졌던 오랜 바람은 그렇게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 40대에도 이어질까 두려웠다. 바보같이 흘려보낸 20, 30대를 후회하며 그때처럼은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시작하지 못하면 똑같은 오늘을 살고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매년 다이어리에 올해의 목표를 적을 때면 빠지지 않던 ‘글쓰기 배우기’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혹시나 흐지부지될까 봐 여기저기 선언하고 다녔다. 글을 배울 거라고!

대부분 나를 응원해줬지만 전 남자친구에 대한 복수 아니냐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다. 전 남자친구가 글을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제는 헤어진 지 너무 오래 지나 그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나 분노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흘려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의 괘씸함은 새겨들었다.


올해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글쓰기 수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매주 A4용지 1~2장 정도의 에세이를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어려운 것은 내가 써간 글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해야 할 때였다. 떨리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울컥하는 눈물을 참느라 곤욕스럽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세심한 표현력을 칭찬해주셨다. 그렇게 두 달의 수업이 끝나고 운 좋게 좋은 친구들이 있는 스터디 모임을 만나 지금까지 2주에 한 편씩 글을 쓰고 있다. 집-회사를 반복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에 나를 확인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얼마 전에는 에세이 월간지에 보냈던 글이 채택되어 실리게 되었다. 처음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했던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대단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고 나를 한껏 띄워주었다. 얼마 후 친구가 카톡을 보내왔다.

“기린! 이거 사려고 자전거 타고 서점으로 엄청 달렸다! 다음에 만나면 사인해줘.”라는 메시지와 함께 내 글이 실린 페이지를 사진 찍어 보내왔다.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김영하 작가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뒤늦게 글을 쓰며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러 이벤트가 생기니 숨통이 트인다. 계속 이 길을 가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나약한 순간들도 있었다. 내가 스스로 깨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준 가족들과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수렁에서 빠져나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어차피 키울 자식도 없으니 나를 열심히 키워볼 생각이다. 비록 남들과는 다른 템포로 살아가며, 가진 것은 없지만 그 때문에 잃을 것도 없다.


요즘은 다른 고민이 생겼다. 건강과 외로움에 대한 것이다.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의 부모를 보면 내가 조심해야 할 질병들이 보인다. 당뇨, 위암, 고혈압… 요즘은 무병장수가 아닌 유병장수라는 말이 있듯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 식사와 수면, 운동에 신경 써야겠다고 느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데 요즘 그리 건강한 식생활을 하지 못했더니 얼마 전부터 위염으로 고생 중이다. 혹시나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보호자가 동반하지 않으면 검사를 안 해주는 곳도 있어서 난감하다. 앞으로 살면서 계속 마주하게 될 일이다.


친구들은 가정을 꾸려서 또는 회사 일로 바빠서 예전보다 보기가 힘들어졌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없을 때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땐 SNS를 열어 주절주절 적는다. 대나무숲의 공허한 외침 같다.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잘 모르겠다. 연애하며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 소모들이 지금의 평화를 깰까 봐 주저하게 된다.


언젠가는 디퓨저 향기도 은은하게 맡을 수 있는 넓은 집에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과거의 영광이 아닌 다시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트로피도 받아보고 싶다. 성인이 돼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40대의 시작이 생각보다 괜찮다. 나는 계속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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