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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09. 2022

여유의 향기

마흔쯤 되면 당연히 아파트에 살고 있을  알았다. 하지만 게으르게 보낸 나의 탓으로 20대나 지금이나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못하고 여전히 원룸 월세를 전전하고 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보증금을 대출 받아 이자를 월세 삼아 내면 되니까 투룸 전세로 옮기는 것은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사 가는 , 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봐 전전긍긍하는 내가 억대 빚을 지고 생활할 2년을 그려보니 월세가 정신건강에  이로울  같았다.




그날은 과장님  집들이  이었다. 10  직장에서 만나 지금까지도 ‘과장님이라 부르는 그녀는 40 중반의 골드미스다. 인생의 숙제 같은 내집마련을 해낸 그녀가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당시엔 ‘거기에  청약을 넣느냐 주변에서는 만류했었지만, 결국엔 과장님의 판단이 옳았다. 이제는 엄청나게 각광받는 신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님도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하며 내 집에 대한 뼈저린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 구석구석 애정이 듬뿍 들어가 있었다. 넓은 복도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점에서 나는 좋은 향기가 났다. 상쾌하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풀냄새였다. 널찍한 30평 아파트였다. 부엌과 거실을 기준으로 왼쪽엔 안방과 드레스룸, 화장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작은 방 3개와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였다. 이방 저방을 오가며 신나게 구경했다. 세 명은 눕고도 남을만한 킹사이즈 침대, 거실과 화장실 타일의 반짝이 컬러의 줄눈, 입구에 특별 주문 제작한 카페 분위기의 중문 그리고 부엌 식탁 위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조명까지… 과장님의 취향이 곳곳에 담겨있었다.


그녀가 과일을 내오겠다고 부엌에 간 사이, 나는 거실의 크고 고급스러운 캐러멜색 가죽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의 초여름 오후. 적당히 따가운 햇살이 거실의 철제 블라인드를 통과하며 타일 바닥에 줄무늬 그림자를 드리웠다. 열어놓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천장에 달아놓은 흰 자개 모빌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건조한 듯 아기자기한 소리를 뿌렸다. 그리고 풍겨오는 상쾌한 풀 향...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내가 꿈꿨던 사십 대 어떤 순간인 것 같았다. 그것을 현실로 이뤄낸 그녀가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집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는 곳은 풀옵션을 갖춘 5평짜리 원룸 오피스텔이다. 둘러볼 것도 없이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는 내방은 아까 그 집의 안방과 드레스룸을 합친 것보다 더 작았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꽉 찬 이 방에선 과장님 집에서 봤던 소파도 식탁도 누릴 수가 없었다. 당장 그런 집을 가질 수 없지만, 집에 변화는 주고 싶었다. 내가 시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디퓨저밖에 없었다.


과장님의 SNS를 보고 똑같은 디퓨저를 주문했다. 꽃시장 향 디퓨저였다. 퇴근을 하고 문을 열 때 그 집처럼 상쾌하고 쾌적한 꽃시장 향이 나를 반겨주길 기대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하고 뚜껑을 열고 검은색의 길쭉한 스틱을 꽂았다. 바로 그 향기다! 책상 옆 선반에 보기 좋게 놓고 흐뭇하게 인증샷도 몇 장 남겼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은은하게 풍길 줄 알았던 향기는 무지막지하게 방을 장악해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30분의 위력만으로도 이미 나의 방은 꽃시장이었다. 도저히 이렇게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화장실로 디퓨저를 옮겼다. 다음 날 아침, 화장실 문을 열자 강력한 향기가 쏟아져 나왔다. 과장님 댁의 은은하던 그 향기가 아니었다. 꽃가지에서 떼어낸 풀들이 입안 가득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이라 그렇겠지, 생각하며 견뎌보았다. 하지만 결국 3일을 버티지 못하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과장님 집은 30평이고, 우리 집은 5평이다. 100mL짜리 디퓨저 향기를 담기에도 벅찬 곳이다. 아직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뚜껑을 닫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집은 꽃시장이다.




되돌아보니 이곳은 당시의 내가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필 집을 보러다녀야 할 때 코로나에 걸려 격리하는 바람에 촉박하게 집을 얻었다. 그래도 퇴근해서 잠을 자고, 글쓰기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원하면 언제든 나가서 산책할  있는 넓은 공원이 있다. 저녁이면 경이로운 그라데이션 석양이 보이는  창이 있고, 방음이 잘되어 가끔은 외롭다 느낄 만큼 조용하다. 이전 집에서 가장  스트레스였던 담배 피는 이웃도 없고 말이다. 다시 보니 좁은  빼고는 딱히 단점이 없는  공간에 애정을 가질 만했다.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음을 품은 바람이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한참  바람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내가 부러워했던 상쾌한  향기는 30 신축 아파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다음 집에 대한 바램은 거실에 방이 하나 딸린 1.5룸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여유를 담을  있는 나만의 집을 꿈꾼다. 그나저나 50 전에 가능하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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