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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Nov 03. 2022

집 없으면 그냥 월세 살고 싶다고?

유독 기분이 좋았던 저녁이었다. 볼품없는 밥을 먹고도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을 보는 순간 선뜻 받지 못했다.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이 오는 아는 동생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어리지만 절대 나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별명을 부른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이런 거야, 저건 저렇게 하는 거야’ 식의 가르치는 말투 때문에 매번 기분이 언짢았다. 작년 통화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쾌하지 못했던 기분만은 생생했다.


벨이 끊어질 때까지 애써 무시하며 할 일을 이어갔다. 하지만 무시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20분쯤 지나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결국은 전화를 받고 말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아... 전화했었구나. 화장실 청소하고 있어서 몰랐어. 잘 지내?”

매번 자기만 연락한다고 그 애는 서운해했다. 그녀는 재테크에 밝아 일찌감치 집을 사서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이번엔 예전에 사놨던 아파트가 재건축되어 곧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고 했다.


“축하해! 집 있어서 부럽다~! 인생의 큰 숙제는 한 거잖아.”


“아이 모르는 소리~ 재산세도 내야 되고 성가신 게 많아.”


“그것도 있어야지 하는 고민인 거지. 나는 1, 2년에 한 번씩 짐 싸고 이사하는 게 제일 싫거든.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나는 집 없으면 그냥 월세 살고 싶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살아볼 수 있잖아.“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럼 자기 집 전세 놓고 나와서 월세 살던가!


나의 불편한 심기는 눈치도 못 채고 그녀는 고민을 털어놨다. 요즘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다고 했다. 친한 친구가 몇 달째 자기 톡을 보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아 잘 있는지 걱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들을수록 친구의 안위보다는 자기를 차단한 건지 신경쓰여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나 보지.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잖아.”라고 아무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대답을 해주었다. 혹시 친구의 상황이 안 좋은지 물어보자 최근에 직장도 잃고 풀리는 일도 없어서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상대는 기분 나빠하는 것 같다며 의아해했다. 자기 친구가 자격지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 친구가 왜 연락을 안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친구 입장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본인의 사실을 포장한 자랑을 했을 것이 뻔했다. 제발 그 친구에게는 월세 살고 싶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길…


사실만을 늘어놓는 것이 대화일까? 상대의 기분과 상황도 생각했다면 그녀의 친구가 지금처럼 연락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나에게도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믿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연락을 짐 싸기도 바쁜 이때 굳이 해서 이사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니 누군가에게 불쾌한 감정이 들면 더 이상 연을 이어가지 않게 되었다. 사람이 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나이 들수록 단점은 더 고착된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굳이 기분을 망치면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다. 만남 후 감정 소모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어쩌다 길어진 통화를 끊고 화장실 청소를 마저 마무리하며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오랜 기억들을 더듬었다. 왜 먼저 연락을 안 하냐 묻던 그녀는 아마도 영원히 답을 모를 것 같다. 나도 그녀의 다음 연락은 받고 싶지 않아졌기에…


아니나 다를까 그 애가 나에게 던져놓은 불쾌한 여운은 이틀 동안 나를 성가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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