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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Nov 18. 2022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가 떠오른다.

게으른 일요일, 무기력을 벗어던지고 나선 곳이 겨우 길 건너 카페다. 언제나 횡단보도 빨간불을 기다리는 시간은 영원 같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발을 구른다. 아직 11월이지만 캐럴을 들어도 될 것 같다. 마침내 파란불의 허락을 받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가 불쑥 떠올랐다. 헤어진 지가 몇 년인데 그는 가끔 홀로그램처럼 나타나곤 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 강산이 변할 만큼이었으니 나의 뇌가 자연스럽게 도출해낼만 하기도 하다.




당시 이미 우리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 있었기에 당장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관계라는 것이 아쉬운 쪽이 상대에게 맞출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그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쥐 죽은 듯 있었다. 난 볼품없는 백수였고, 그는 다음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국회도서관에서 데이트. 아니,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옆에 내가 붙어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안경을 쓰지 않고 콘택트렌즈를 끼고 나왔다. 그는 약속이 있는 날 렌즈를 낀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의 약속은 아닐 것이다.


몇 시간을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억지로 책장을 넘겼다. 보이지도 않는 먼 책상에 따로 앉아있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기도 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짐을 두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겨울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걷고 싶었다. 여의도 공원을 지나 쇼핑몰까지 가버렸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캐럴 음악, 수많은 인파 속에 나만 고요하고 초라했다. 카페에 들어가 운 좋게 난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커피잔을 감싸 쥐고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둘이었다. 나는 내 앞 빈 의자를 바라봤다.

‘차라리 저 의자가 없었다면 덜 외로웠을까? 지난 8번의 크리스마스 중 우리는 몇 번이나 함께였던가?’

주책맞은 눈물을 훔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그는 도서관에서 나가자고 했다. 짐을 챙겨 나오며 약간의 기대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나는 그와 발을 맞춰 걸었다. 그런데 그는 한발, 두발 점점 앞서나가더니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그와 나는 남처럼 횡단보도를 건넜다. 뛰어서 따라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결국 따로따로 지하철역에 도착했고 각자의 행선지로 향했다. 그게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며칠 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알았다. 그는 동호회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상황을 유도했다는 것을... 내가 내장이 녹아내리는 것같이 아파하며 울고 있던 며칠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성탄절 파티를 즐기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가 떠오른다.

나를 앞서 걸어가던 그의 회색 캔버스 운동화가 떠오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던 그의 뒤통수가 떠오른다. 설렘을 애써 감추던 입꼬리와 오랜만에 깔끔하게 면도한 맨들맨들한 턱이 떠오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드러낸 그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카페에 도착해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커피잔을 감싸 쥐고 손을 녹이다 내 앞의 빈 의자를 바라봤다. 둘 곳이 애매했던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더 이상 외로움의 다른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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