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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Nov 26. 2022

한마디 거짓말로부터

어쩌면 내가 가진 가장 어릴 적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5살 무렵, 우리 집은 주택들이 모여있는 좁은 골목, 양옥집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그날도 동네 아이들과 골목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왔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 팔을 보고 다그쳤다.


“어디서 이랬는지 바른대로 말해!”


긁힌 상처가 있었다. 엄마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디서 긁힌 것 같다고 말했다. 옆집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성격이 유별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짧고 뽀글뽀글한 머리에 볼이 두둑한 것이 못난이 인형을 닮은 애였다. 그 애의 주특기는 꼬집기였는데 내가 그 애에게 꼬집혀서 상처가 났으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니 애비 닮아서 너도 거짓말하니!“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을 한 엄마는 나를 작은 방에 가두었다. 사실을 말할수록 거짓말쟁이가 될 뿐이었다. 어둡고 무서웠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아빠 책상에 앉아 낙서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울고불고하며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비는 것이 엄마가 원하는 것이었을 게다. 원하는 것을 해주기 싫었다. 나는 결백하니까!




‘거짓말’은 엄마의 이성을 모두 마비시켜 버리는 발작 버튼이었다.

중사 월급으로 4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한 와중에 시댁 식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다.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것 같아 질투하는 할머니. 빚 갚아 달라는 할아버지. 자격증 딴다, 재수한다 손 벌리는 두 시동생.


그들은 드러내놓고 이야기 사람들이 아니다. 무엇이든 속닥속닥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할아버지의 빚을 해결해보려던 아빠는 엉성한 거짓말을 했다가 엄마에게 들키기를 여러 번이었다. 할머니는 내 동생이 태어나 산후조리를 해주러 왔을 때, 아빠가 출근하면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유는 엄마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오히려 엄마가 할머니의 밥상을 차려드려야 했다. 아빠가 퇴근하고 나면 할머니는 이간질을 해놓고 가버렸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엄마에게 차갑게 돌변했다.




방에 갇혔던 그날 때문인지, 그런 엄마를 보며 자라서인지 몰라도 나 또한 거짓말에 엄격한 사람이 되었다. 너스레를 떨며 할 수 있는 빈말도 하지 못해 가끔은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긴 연애가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쯤, 남자친구는 밥 먹듯이 거짓말을 했다. 고향 집에 간다고 하고 친구와 여행을 갔던 일부터 시작이었다. 아는 형과 술을 마셨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와 단둘이 술을 마셨다던가, 일을 하는 중이라고 하고는 동호회 모임을 갔다던가... 그럴 때마다 나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 모든 순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뇌의 한 부분은 그 끔찍한 일들만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그의 거짓말이 탄로 날 때마다 조목조목 추궁하던 내 모습은 나와 아빠를 다그치던 엄마를 닮아있었다. 그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됐지만 그런 자신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도 딱 한 번, 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던 날, 동호회 뒤풀이에서 평소보다 과음을 했다.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새벽 시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지하철 첫차를 탈 수 있었다. 마침 그중 한 친구가 주변에 살고 있었기에 그 집으로 몰려갔다. 첫 차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은 술을 더 마시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고… 토를 해버렸다.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첫 차 시간은 진작에 지나 있었다. 집주인인 친구가 언제 약국에 다녀왔는지 드링크제와 술 깨는 약을 건네주었다. 단숨에 약을 꿀꺽 삼켰다.


“미안해... 미안해... 고마워... 고마워...”


“갈 수 있겠어? 내가 태워다 줄게”


그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왕복 1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다. 친구도 피곤했을 텐데 흔쾌히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친구에게 온갖 민폐를 끼쳐놓고 인생 최악의 흑역사를 쓴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누워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지난 9년 동안 한 번이라도 그가 이렇게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되짚어 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연애 초를 제외하고 아픈 나에게 약을 사다 준 적, 집에 데려다준 적, 하다못해 만나고 집에 들어갔을 때도 잘 들어갔냐는 연락 한 번이 없었다. 숙취로 빙빙 도는 천장보다 각성한 마음이 더 고통스러웠다.




“뒤풀이 끝나고 바로 집에 왔지 뭐”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내가 무얼 하다 언제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의무감에 한 전화였을 것이다. 나는 이 한마디 거짓말에도 죄책감이 몰려왔다. 나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지만, 한편으론 복수를 한 것 같은 통쾌함도 느껴졌다.


처음으로 그가 모르는 나만의 세상이 생겼다.

'그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을까? 그것으로 나에게 얼마나 더 멀어져 있을까?' 하는 자각을 하며 비로소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한마디 거짓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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