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기린 Dec 25. 2022

속초

영하의 한파에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속초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속초를 좋아한다. 여행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돌아보니 내가 가장 많이 갔던 여행지는 속초였다. 연인, 가족, 친구들과 총 7~8번 정도 방문했던 것 같다.


속초엔 호수와 바다, 산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좋다. 게다가 뚜벅이인 내가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청초호, 시장, 아바이마을, 영금정 등 주요 관광지를 손쉽게 돌아볼 수 있어서 부담 없이 만만한 곳이다. 맛있는 것도 많아서 좋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탓에 한번 마음에 들었던 식당은 갈 때마다 방문하곤 했다. 아마 남들도 모두 아는 갯배 선착장 앞 '88생선구이'와 청초호 옆 '청초수물회'를 가장 많이 갔던 것 같다.


물회와 오징어 순대
생선구이




속초는 나에게 마디 같은 곳이다.

무기력에 잠식되어 있던 지난날을 끊고, 다시 시작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곳. 스물여섯 살. 첫 직장을 그만뒀다. 디자인업에 대해 커다란 실망을 하고 다시 그 업계로 돌아가는 것조차도 싫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갈필을 잡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간간히 입사 지원을 해 마음에도 없는 면접을 봤지만, 그런 지원자를 뽑아줄 회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때쯤 얼마 있지도 않은 돈을 들고 속초로 여행을 갔다.


12월 끝자락이었다.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었고, 누군가 길에 만들어놓은 눈사람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새로운 장소에 오니 그간의 시름은 거짓말처럼 잊혀졌다. 바닷가 바로 옆에 위치한 큰 창이 있던 숙소에 묵었는데, 아침에 해돋이를 보겠다고 커튼을 치지 않고 잠이 들었다.


곤히 자고 있던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빛에 힘겹게 따가운 실눈을 떴다. 수평선을 벗어나 떠오른 커다란 태양. 그 순간 태양과 나. 세상에 단둘이만 있는 것 같았다. 그 햇살들이 나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며 충전이 되는 듯했다. 그간 나에게 있던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들과 실패의 부스러기들이 사라지고 점점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편집 디자인이 아닌 웹 디자인으로 전업하기로 결심했고, 자신감을 다시 찾으려면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명한 디자인 학원을 찾아가 이론부터 다시 배우며 정말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데 매진 했다. 그렇게 시작해 지금까지 웹디자이너로 살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퇴사를 하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친구와 속초에 갔다. 영금정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거리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그간 했던 이야기보다도 더 깊은 속내를 꺼내놓으며 우리는 그간의 걱정들을 훌훌 털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속초에 다녀오면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포장마차 거리에서 한잔


코로나로 거의 2년 만에 떠난 첫 여행도 속초였다. 속초에 도착하자 터미널 옆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물회 집에선 로봇이 서빙을 하고, 포장마차 거리 옆엔 카페거리가 생기며 속초도 많이 변화해 있었다.


역병 때문에 불안함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었고, 그래서 더 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다가 몇 년 만에 바다를 마주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유독 파도가 시원하게 쳤다.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가슴 속이 뻥 뚫렸다. 속초를 떠나기 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한참 그것을 즐기다 온 것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속초해수욕장 파도




올해는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평화로운 한해였다.

벼르던 글쓰기를 시작했고, 그로 인한 작은 이벤트들로 이어져 다채로운 한 해를 보냈다. 코로나를 겪긴 했지만,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회사생활도 몇 가지 이슈가 있긴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감내할 수 있는 스트레스 들이었다. 2023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아직 정리도 하지 못했는데 올해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속초에 갈 때가 된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쓰레기 보석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