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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Feb 19. 2023

해피엔드

근본없는 영화 리뷰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루했던 토요일 오후, 유튜브 영상 리스트만 계속 새로고침하고 있던 차에 숏츠 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영화 ‘해피엔드’

배우 전도연이 식탁에 앉아 알약을 과도로 4등분을 한 후, 그중 한 조각을 젖병에 넣고 분유를 몇 숟갈 넣었다. 복잡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젖병을 흔든 후, 눈물을 흘리며 ‘섬집아기’ 노래를 부르며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장면이었다. 내연남을 만나러 가기 위해 아기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먹인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기에 자식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뛰쳐나간단 말인가? 영화가 궁금해졌다.




영화 해피엔드 포스터

정지우 감독의 1999년작인, 이 영화의 영상이 왜 갑자기 추천된 것일까? 아마 주인공인 최민식, 전도연 배우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카지노'(디즈니플러스)와 '일타스캔들'(tvN)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해피엔드’는 한국 영화 중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여러 번 영화 관련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어 대략 내용은 알고 있던 터였다. 개봉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기에 청소년 관람 불가인 이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불륜남에게 누명을 씌워 완전범죄를 해낸 이야기다.


남편 서민기(최민식)는 실직한 은행원으로 직업을 구하던 중이었고, 아내 최보라(전도연)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영어학원 원장이다. 김일범(주진모)과 최보라는 대학생 때 사귀었던 사이였지만 일범의 군입대로 헤어졌다. 하지만 우연한 재회 후 깊은 사이를 유지해왔고 남편인 민기는 그들의 사이를 눈치채게 된다.




24년이 지난 영화를 보니 내용 외에도 과거의 것들을 보며 추억에 빠져 들었다. 여전히 그대로인 것과 달라진 것들이 보여 흥미로웠다.


일단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베드신에 놀랐다. 요즘에도 놀랄만한 파격적인 수위였다. 그때문에 보라의 복잡한 심경과 민기가 느낄 배신감에 더 몰입이 되었다.



체크 남방 패션 (영화 해피엔드)
백화점에서 체크 남방을 고르고 있는 보라 (영화 해피엔드)
2000~2001년 인기리에 방영된 'god의 육아일기' 속 체크 남방을 입은 god 멤버들


가장 많이 눈에 띈 건 패션이었다. 이 영화에서 일범은(주진모) 당시 흔치 않던 웹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세련된 남자이다. 당시 안에 흰 티를 입고, 겉에 체크 남방을 걸친 후, 힙합바지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TV에서나 길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유행 패션이었다.



민기를 꾸짖고 있는 보라 (영화 해피엔드)

반가운 브랜드 ‘CLUB MONACO’. 현재도 존재하는 브랜드지만 인기가 저 때만 못한 것 같다.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패션 잡지(쎄시, 신디더퍼키, 에꼴 등)를 탐독하며 패션디자이너를 꿈꾸기도 했었다. 클럽 모나코는 가격이 꽤 비싼 편이었고, 무채색의 심플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나인식스뉴욕’과 비슷한 느낌의 브랜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맥도날드 햄버거 세트를 먹고 있는 민기 (영화 해피엔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민기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보며 패키지가 보였다. 현재와는 다르게 패키지에 비주얼이 많이 들어있다.



빗속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민기 (영화 해피엔드)
현재 KB국민카드 LOGO


은행원이었던 민기가 빗속에서 아련하게 회사를 바라본다. 뒤로 현재와는 많이 다른 1999년 당시 국민카드사 로고가 보인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국민은행 종이 통장 디자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카스 맥주를 마시고 있는 민기 (영화 해피엔드)
분리수거하는 민기. 서울우유와 카스가 보인다. (영화 해피엔드)
카스 맥주 디자인 변천사 (출처:오비맥주) / 서울우유 현재 패키지


현재도 여전히 인기 제품인 cass 맥주와 서울우유가 영화에 등장한다. 카스는 여러 번의 패키지 변화가 있었지만, 서울우유는 거의 비슷한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와중에 최민식의 그윽한 눈이 인상적이다. 순박하고 사슴같은 눈망울을 가진 민기를 보면 앞으로 그가 벌일 끔찍한 일이 상상되지 않는다.



웹디자이너인 일범 (영화 해피엔드)

일범의 직업이 웹디자이너인것이 재미있었다. 인터넷 환경이 자유로워진 것이 1999년 정도였나보다. 돌아보니 그때 처음 학교 수업 시간에 hanmail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싸이월드가 생겼던 때도 1999년이다. 내 직업이 웹디자이너인데도 은연중에 2004~2005년쯤 이 직업이 생겨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범은 당시 흔했던 엄청나게 큰 CRT 모니터가 아닌 얇은 모니터를 가졌다. 특별히 신경 쓴 설정인듯 하다.



보라의 사진을 안고 우는 민기 (영화 해피엔드)

두 배우의 이후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지점이 되었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24년 전이지만 최민식과 전도연의 연기는 이미 완성형으로 느껴졌다. 완전범죄를 성공한 후, 화장실 바닥에 앉아 아내의 사진을 안고 우는 장면에서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보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우연이겠지만 여기서 전도연의 직업이 영어학원 원장이었는데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이 영어학원 원장으로 등장한다.



(영화 해피엔드)

죽은 보라가 이승을 떠난 것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


OST도 훌륭했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라고 한다. 현악기와 어우러진 피아노 선율은 닥쳐온 불행의 긴장과 절망, 담담함까지 느끼게 하다가 이내 감정을 극으로 치닫게 만들어 주었다. 민기는 결국 아내인 보라를 죽이고, 일범을 범인으로 꾸미는 것에 성공해 민기 입장에서의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한 가지 의문은 내가 영화에서 놓친 것인지 몰라도 민기가 어떻게 일범의 집을 알아냈는지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범이 죽은 보라를 보고도 가버렸다는 것도 관객에게 추측하게 두기보다 장면으로 직접적으로 덧붙여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마지막 편집과정에서 고심 끝에 빼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요즘 시대 버전으로 만든다면 곳곳에 있는 자동차 블랙박스와 CCTV 때문에 사건을 더 꼼꼼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민기가 추리소설을 보고 아무리 치밀하게 꾸몄다고 해도 지금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최근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관람한 후, 예전 영화에 대한 향수가 짙어졌다. 학생 때 나의 모습과 그 시절 분위기가 떠올라 더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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