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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Feb 09. 2023

막차. 그리고 첫차

요즘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다. 매일 혼자 술을 마셨다. 결제해 놓고 보지도 않던 넷플릭스를 보고, 책도 읽고, 좋아하지 않던 달달한 케이크도 먹어본다.  


아직 마흔한 살밖에 안 됐는데, 나는 요즘 인생 막차에 탄 기분이다. 사방이 깜깜한 외곽 도로… 그 위를 삐걱대며 달리는 낡은 버스, 승객은 나뿐인 막차.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앉아있는 그런 기분. 조금 무섭기도 하고, 지쳐있고, 쓸쓸하다.




얼마 전, 배우 김혜자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녀가 출연한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가 나의 인생 드라마일뿐더러, 영화 ‘마더’를 보면서 연기 내공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봤기 때문에 더 관심 있게 시청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울렸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져 얼마 전에 출간된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연기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한 남자의 아내,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 전에 그녀는 배우였다. 삶은 온통 연기에 대한 고민과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까? 휴대폰 메모장 앱을 켜 적어본다.

‘모래 한 알, 스쳐 가는 바람에도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임무를 부여받고 태어난 사람일까?’


일단, 여성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마도 생물학적 쓰임을 하지 못할 듯하다.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이젠 노산이기에 자연임신도 어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못 하는 족속이 자식을 낳는 건 모순적인 일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어떤 쓰임을 가졌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디자이너, 특히 IT 쪽 디자이너는 직업 수명이 참으로 짧다. 기술과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젊고 싼 인력들은 넘쳐난다. 결국은 PM(프로젝트 매니저)이 되거나 회사를 창업하는 노선을 택한다. IT 업계 자체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50살이 넘어서까지 디자인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을 때, 국민연금 받을 만 64세까지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작년엔 조금 신이 났었다. 처음으로 글쓰기를 배우고, 관련 모임들에 참여하며 늦게나마 ‘내가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길을 잃은 느낌이다. 불현듯 찾아온 인생의 노잼시기를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별수 있나. 내가 제일 잘하는 것. 그저 버티는 수밖에…


그래도 이제는 알고 있다. 버스는 결국 종점에 도착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첫차가 되어 출발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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