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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Mar 05. 2023

근데 왜 하나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까요?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엔 동료들과 산책을 한다. 시청, 정동길, 청계천 멀게는 광화문까지... 그날은 날씨가 추워서 지하상가를 돌다가 마침 동료가 볼 것이 있다고 해서 백화점에 가게 되었다. 예전엔 백화점에서 옷도 사고, 화장품도 샀는데 그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난다. 아마 10년 전이 마지막인 것 같다. 




식품관이 아닌 패션 매장을 돌아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브랜드 이름도 죄다 낯설었다. 매장마다 서 있는 마네킹엔 맵시 있는 옷들이 입혀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양질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코트, 칼주름이 잡혀 기장이 발목까지 딱 맞게 떨어지는 바지. 단순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카디건. 진열장에 모셔져 있는 가방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이 즐거워졌다.


“와... 예쁘다. 근데 왜 하나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까요?”

“진짜요? 저는 돈만 있으면 다 사고 싶은데요?”


같이 간 동료는 모든 걸 다 사고 싶다고 했지만, 어찌 된 것인지 나는 갖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쇼핑 욕구는 오랫동안 거세된 채 살아왔다.


걸음을 옮기는 사이 매장에 비치된 거울에 잠깐씩 비치는 내 자산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걸치고 있는 롱패딩은 오로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맨투맨 티와 청바지는 편안함에만 초점을 맞춘 선택이었다.


아침이면 겨우 이불속을 기어나와 씻고 나가기에도 벅차다. 익숙함과 편안함만 찾다 보니 멋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이제 그 거리를 좁히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만 같다. 코로나 이후로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그나마 하던 귀걸이도 걸리적거려서 하지 않게 되었다. 화장도 기초화장만 한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액세서리는 성가시다. 쓸모도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 새삼스러운 장신구. 그렇게 내 삶은 밋밋하고 담백하게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없기도 하고...




백화점 거울 속 내 모습이 떠올라 간만에 쇼핑 앱을 열었다. 몇 가지 상품을 살펴보다 결국은 앱을 금세 닫아버렸다. ‘아, 귀찮아’


예전의 나도 이랬던가? 중고등학교 땐 쇼핑에 꽤 열정적이었다. 패션잡지를 보면서 갖고 싶은 것들을 오려서 스크랩도 하고, 부모님이 옷을 사주실 때면 시내에 있는 매장은 모두 들어가서 둘러보고 입어봤다. 겨울 코트나 패딩을 사야 할 때면 몇 주 전부터 매장을 돌며 미리 탐색하는 기간을 가졌다. 대학교 땐 당시 흔하지 않던 과감한 오프숄더 상의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 내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구나.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평생 살찔 걱정은 없이 뼈다귀로 살아왔던 내가 36살이 넘어가며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마르고, 날씬한 몸이 아니니 다 망가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백수 생활이 길어지며 최악의 재정 상태와 함께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도대체 내 삶이 나아지긴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무기력했다. 덩달아 구매 욕구가 거세되어야만 상실감과 거리가 멀어질 것이 아닌가. 생필품이 아닌 소비는 사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밋밋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좋은 변화로 꼽을 수 있는 것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잠깐 집 앞 슈퍼에 나설 때조차 씻고, 간단한 화장을 하고 아이라인까지 그려야만 집 밖을 나설 수 있는 인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마주칠 몇분의 시간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피곤한 삶을 살아오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고는 내실을 다지며 나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의 멋을 곁들여도 괜찮겠다는 각성을 해본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멋이 아닌 나를 표현하는 멋. 정성스레 집의 정원을 가꾸듯 나를 사랑하는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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