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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n 18. 2023

산책이라는 마법

얼마 전 한가하던 평일 오후, 느껴본 적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창문도 없는 4평 남짓의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5명이 일하고 있다. 얼마나 조용하냐면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숨 막힐듯한 고요함은 나를 잔뜩 긴장시킨다. 꽉 조이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고 사방의 벽들이 다가오는 듯했다. ‘으악!’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잠시 밖에도 나갔다 왔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수다를 못 떨어서 그런가 하고 친구를 만나 목이 아프도록 떠들었다. 그런데도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문득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산책을 한 것이 언제인지 떠올려 보았다. 




처음 서울식물원에 가보게 된 것은 친한 언니의 집들이 때였다. 집 구경을 마치고 집주변 식물원으로 갔다. 마침 4월이었기에 갖가지 색깔의 튤립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나무들이 아직 어려 보였지만 넓고 깨끗한 길과 꽃, 나무, 흙길, 호수가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곳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고 밤이면 취객들이 넘쳐나는 먹자골목이 있었다. 걷고 싶어도 거닐 곳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네 커피숍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몇 시간 머물다 오는 일뿐이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좋은 일이라곤 없었다. 오랜 연인과 헤어졌고, 잘 다니던 직장은 갑작스레 퇴사하게 되었다. 1년이 넘는 긴 공백 후 가까스로 다시 취직에 성공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백수가 됐다. 그곳에 살던 7년 중 3년을 방구석에 누워 보낸 꼴이 되었다. 겨울잠 자는 곰처럼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누워 무기력하게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통장 잔고는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며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3주 동안 두문불출했다. 발이 묶이니 생각도 경직되었다. 갈수록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지나가는 말에도 발끈해 쏘아붙였다.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내 인생을 새 출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답은 이사였다. 멈춰버린 일상에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손쉽게 걸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얼마 전 가봤던 서울식물원이 떠올랐다. 식물원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후 나의 바람대로 순식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며칠이고 집에 처박혀 있던 내가 이틀만 나가지 않아도 좀이 쑤셨다. 그럴 때면 재빨리 식물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눈과 귀를 열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막막했던 상황들이 거짓말처럼 해결되기 시작했다. 무기력은 사라졌고 지인의 추천을 받아 갑자기 직장도 생겼다. 부정적인 마음을 걷어내고 다시 긍정의 옷을 입혀준 고마운 곳이다.




서울식물원 산책을 나설 때는 일몰 1시간 전이 딱 좋다. 발걸음이 가볍도록 신나는 음악을 선곡하고 박자에 맞춰 씩씩하게 걷는다. 요리조리 건널목을 몇 번 건너며 10분 정도 가면 서울 식물원 입구가 나온다.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데도 마음이 급해진다. 벌써 하늘에 오렌지빛과 보라색의 그러데이션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민들레 씨 조형물과 유리로 된 온실 건물을 지나면 호수가 보인다. 


21년 7월 어느 여름날의 석양


식물원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곳은 습지원이다. 동네 주민들도 잘 모르는 장소이다. 호수 끝자락에 보이는 다리 밑을 지나면 자연 천이 보존되어 있는데 물가를 따라서 각종 철새들을 관찰하며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도 이어진다. 


습지원
습지원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산책의 하이라이트인 한강 전망대가 나온다. 나의 산책 반환점이다. 전망대 끝에 서면 널따란 한강이 흐르고 있고 멀리 북한산까지 보인다. 하늘에선 붉은 해가 오늘 할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마곡대교에는 공항철도가 은하철도처럼 지나가고 왼쪽에 있는 방화대교는 석양과 함께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낸다. 나는 전망대의 항상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매번 다른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방화대교
마곡대교. 맑은 날은 북한산까지도 보인다.


나만 보기 아까웠던 오늘의 석양을 SNS에 공유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이때는 조용한 음악으로 선곡하고 느리게 걷는다. 그리고 생각에 집중한다. 오롯이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망설였던 일들을 결정한다. 


걷다 보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다. 커플 운동복을 입었지만 서로 멀찍이 떨어져 걸어가는 남녀, 화려한 치장을 하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비숑 3마리와 가는 여자, 물병과 운동화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벤치,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시는 아줌마와 그 옆을 영특하게 따라가는 말티즈...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숨겨진 이야기들을 혼자 완성시켜 보곤 한다. 식물원은 나의 헬스장, 병원, 충전소, 놀이터, 창작 노트다.





옷을 챙겨 입고 오랜만에 식물원에 갔다. 비록 일몰시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걸었다. 오롯이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고 집으로 돌아오니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한동안 나를 괴롭히던 답답함도 사라졌다. 산책이라는 마법으로 충전한 후 또 다음 주를 살아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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