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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n 25. 2023

질투

마흔을 앞두고 사십춘기를 세게 겪은 이후로 지루할 만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로운 하루에 감사하며 한 발짝씩 나의 길을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며칠 전 그녀의 연락으로 나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지고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를 시기, 질투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근래 지인들이 그런 뉘앙스가 풍기면 ‘사람 사는 것이 다 각자의 삶과 속도가 있는 건데 왜 속 좁게 질투를 하고 그러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았다. 내 옆에 그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 때문에 지독히도 속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였다. 같이 입시 미술을 준비했고, 같은 대학에 갔다. 내성적인 성격 이면에 숨겨진 장난기는 우리끼리 낄낄거릴 추억들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경쟁자였다.


그 발단은 내가 공모전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던 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와 나는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같은 공모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꾸린 팀은 달랐다. 


강의가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수상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후 그녀는 눈물을 보이며 혼자 집으로 가버렸다. 내가 상을 받게 된 것이 질투 나서 눈물이 난 것이었는지, 본인이 못 받은 것이 속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 이후 우리에게는 점점 벽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공모전에 계속 출품하며 몇 개의 상을 더 탔고, 덩달아 교수님들의 예쁨도 받게 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동아리 선후배들과 더 어울리는 일들이 많아졌고,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함께 강의실에서 같이 무리 지어 앉았던 친구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앉지 않았다. '뭐 그럴 테면 그러라지' 생각했고 속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학교라는 굴레를 벗어난 나는 부담감에 제대로 길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대고 있을 때, 그녀는 차분히 내실을 쌓아 커리어를 만들어 갔다. 졸업 후 첫 직장을 1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퇴사하고 백수가 되었을 때, 그녀가 점심을 먹자고 불러 회사 근처로 갔다. 그녀의 회사가 있는 커다란 빌딩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훌쩍였다.


아… 자격지심이 덕지덕지 묻은 바보 같은 기억이 하나 더 떠오른다. 번화가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 먹고 나가려 할 때 그녀가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백수인 친구를 위해 밥을 사줄 수도 있는 거고, 나도 얻어먹을 수도 있는건데...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나는 그것이 너무도 속이 상했다.

"내가 낼게~"

“아니야 내가 낼게. 내가 낸다고!”

밥 잘 먹고 나오는 마당에 나는 정색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움찔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결국 내가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들쓰고 많이 울었다. 내 못난 자격지심을 다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였다.


그 이후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고,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녀의 결혼을 앞두고 오랜만에 만났다. 당시 나는 매일 새벽 야근에 시달렸기에 후줄근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회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당일에 약속을 잡는 바람에 그 몰골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자리인데 그런 모습으로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였으니 결혼은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간 지 1초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그녀는 명품 구두와 가방에 코트를 입고 제법 우아하게 등장했다. 인조털이 부실하게 듬성듬성 달린 싸구려 패딩을 걸치고 피곤함에 찌든 나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오랫동안 사귄 나이 많은 남친이 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오래 만났는데 왜 결혼을 안 해?'라는 말을 수차례하며 자신의 연하 신랑 칭찬을 해댔다. 그날 나는 가드를 올리기도 전에 강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약속에서 돌아와 남자친구에게 자초지종도 말하지 못하고 짜증만 냈다. 세수를 하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약이 올라 혼자서 욕지거리를 하기도 했다.




그 이후 연락이 끊겼다가 며칠 전 10년 만에 연락이 왔다. 우연히 예전 사진을 보다가 내 사진을 보고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나?


예전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며 정말 세월 빠르다 하며 이야기하면서 나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나의 30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반면 그녀는 결혼해서 자식 낳고 회사도 다니며 집도 넓히고 서울에서 제법 비싼 동네에 살고 있었다. '언제 한번 얼굴 보자'는 기약 없는 인사로 오랜만의 연락을 마무리 지었지만 아마 만나지 못할 것 같다.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예능 중에 인생극장이라는 코너를 아는가?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A와 B의 갈림길에서 선택에 따라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보여줬던 인기 코미디였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인생극장이 생각난다. 비슷한 가정환경, 같은 학교와 전공을 마치고 얼마나 다른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표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2, 30대를 어떻게 보냈든 지금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질투심이 솟아나더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보다 속상함만 가득하다. 그녀는 앞으로도 실속 있고 야무지게 자기 삶을 꾸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모르겠다. 여전히 나의 삶은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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