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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l 09. 2023

여행을 꼭 좋아해야 하나요?

몇 년 동안 내 머리를 전담해 주는 헤어디자이너는 3월부터 들떠 있었다. 6월에 떠날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예약해 놓았다며 나에게 휴가 계획을 물어왔다.

“고객님은 휴가 어디로 가세요?”

“글쎄요? 어디로 가고 싶긴 한데… 가고 싶은 곳이 없네요.”




여름휴가? 날씨는 6월부터 이미 30도를 넘어섰다. 나는 추위보다 더위를 더 힘들어한다. 코로나 기간에 마스크를 무조건 써야 했을 땐 너무 더우면 속이 매슥거리면서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고, 기력이 훅 떨어졌다. 에어컨이 없이 살던 20대 후반엔 매년 여름마다 더위를 먹어서 수액을 맞는 것이 필수 코스이기도 했다.


덥고 추울 때는 사실 회사가 최고다. 여행도 날씨 좋을 때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9~10월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너무 일상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염증이 났다. 어느 영상에서 보니 뇌는 반복되는 비슷한 기억을 하나로 합쳐버린다고 하던데 지난 6달 동안 계속 비슷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몇 개의 기억밖에 없다. 그나마 좋다고 자부하던 기억력마저 쇠퇴하고 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인지 어제 있었던 일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일까지 있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우습게도 어디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나는 3일의 여름휴가를 쓸 수 있다. 같이 떠날 사람도 없으니 혼자 가는 김에 해외 패키지여행을 가볼까 하고 여행사 사이트 이곳저곳을 들어가 보았다. 여름휴가라고 주어지는 3일은 사실 1년 중 어느 때나 쓸 수가 있으니 추석 연휴 앞에 붙이면 연속 9일을 갈 수 있다. 그러면 먼 곳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여행지 이곳저곳을 보면서도 하나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쩜 이렇게 구미가 당기는 곳이 하나도 없을까?


너무 먼 곳은 시차 때문에 힘들 것 같고, 물놀이를 좋아하지도 않고, 유적지를 구경하고 싶지도 않고, 도심은 더 싫고, 휴양지에서 유유자적 있는 것도 혼자는 심심할 것 같고…. 어떤 설렘 따위도 없었다. 그러니 여행지 월드컵 같은 것으로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해외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 다니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 가는 그런 사람이다. 공모전 수상으로 대학생 때 우연히 가게 된 프랑스 이후, 33살이 되어서야 내 의지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싱가포르, 그다음은 홍콩, 마지막이 베트남 하노이였다. 심지어 베트남에 갔던 것도 벌써 6년이나 지났다. 새로운 곳에서 생길지 모르는 돌발상황이나 알 수 없는 것들이 나에게는 두렵고 피곤한 일로 느껴졌다. 막상 떠났던 여행들에서는 그런 일 없이 즐거운 여행을 했지만 말이다.


TV 프로그램이나 잡지, 책들을 보면 당연히 인간의 큰 열망 중 하나가 여행이라는 것으로 단정 지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마치 당연히 여행을 다니고만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해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은 보기 싫었다. 금전적 여유가 있으면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많은 사람들은 여행 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하던데, 나는 고민해 적어 보니 뒷마당이 있는 집에서 화초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나도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재미있어한다. 그러면서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보는 것으로 족한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내가 우리 가족 중에서는 가장 해외여행을 많이 가본 사람이니 어쩌면 이건 그냥 가족 내력이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우리 엄마는 1박 2일 국내 여행에도 베개와 이불까지 챙겨가야 하는 사람이다)


국내 여행은 자동차가 없으니, KTX로 갈 수 있는 곳을 주로 간다. 이동에 제약이 있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한계가 있어서 가는 곳이 거기서 거기이게 되었다. 물론 내가 맘껏 호기심을 갖고 즐기는 타입도 아니니 체험하는 것에도 서툴다.


그런 내가 30대 초반에 여행학교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여행에 대한 욕망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마 내 마음속에는 당연히 떠나고 싶은 열망이 있을 거야. 언젠가 여행은 갈 테니 제대로 여행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의 기대와 높은 강의료와는 달리 수업내용은 그리 깊이 있게 느껴지지 않아 실망했지만 (나는 제법 기수 운이 있는 편이라) 좋은 분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다양한 연령대와 접해보지 못한 직업들…. 그리고 그분들이 경험한 많은 여행지들과 뿜어나오는 에너지. 그분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았고 정말로 여행을 좋아하는 즐기는 분들이었다. 모두 너무 좋은 분들이고 나를 다정하게 반겨주시고 수업 이후 이어진 모임들도 즐거웠지만 이상하게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엔 매번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정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구나.




그런 나도 떠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아주 작은 새로움이라도 있었으면 해서 동네에 안 가본 카페를 가보기라도 하는 요즘 같을 때 말이다. 하지만 국내도 해외도 어디 하나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떠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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