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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l 16. 2023

스트레스 캔슬링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나의 귀에 꽂혀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귀를 꽉 막는 커널형 이어폰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속에 들어간 듯한기분도 싫지만, 전혀 통풍이 안 되는 채로 있으면 땀이 차고 염증이 생길 것 같고, 고막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줄곧 오픈형 이어폰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을 선택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은 사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내 삶도 '스트레스 캔슬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예민하다. 신경질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감지 안테나가 몇 개 더 달린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아주 커다란 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살아있는 감각으로 발견하고 기억하고 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예는 아닌 것 같지만) 지도에서 위치가 헷갈리는 음식점을 냄새로 찾는다든가, 대화의 행간을 읽고 추측해서 "아… 그게 뭐지? 생각이 안 나네"라는 말에 말하려던 것을 맞춰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던가, 음악 1초 듣고 맞추기, 건더기 보고 라면 브랜드를 맞추기, 한 번 갔던 길 기억하기 등등... 넘쳐나는 정보들이 다 쏟아져 들어오며 쓸데없이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이걸 공부로 승화시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불안편'에서 였던가) 동물들에겐 위험을 미리 감지할 수 있도록 무리의 5%가량은 예민함을 가지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마 내가 그중 한 명인 걸로 치자.


중학교 때는 잠깐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반 아이들이 소근소근 떠드는 이야기를 다 듣고 온갖 것을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지어줬다. 들리는데 어쩌겠는가. 가장 괴로운 건 나다. 집중하기가 어렵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들의 온갖 사정들을... 그래서 나는 이어폰은 끼고 가사가 없고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음악을 듣지 않으면 집중하기 힘들다. 그렇게 정보 하나는 차단해야만 한다. 집중했다고 해서 누가 불러도 모르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조용한 것은 더 힘들어한다. 혼자인 공간에서 조용한 것은 괜찮지만 여러 명이 있는 공간에서 작은 소음정보도 증폭된다. 그래서 독서실이나 도서관의 고요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요즘 회사에 일이 없다. 정말 심각하게 없다. 지난 2달간 단 3건, 그것도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사무실은 정말 쥐 죽은 듯 적막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숨 막히는 고요함 때문에 바람 세기를 일부러 ‘중’으로 틀어놓은 공기청정기 소리와 소음 빌런의 숨소리, 기침 소리, 가래 뱉는 소리, 하품 소리, 코 고는 소리... 그래. 그건 예민한 내가 아니어도 모두에게 들리는 소리다. 그 사람이 갑자기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처음에는 내가 그곳의 일을 파악하기 바빴고, 그다음에 일하느라 바빴기에 그러려니 하며 지나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그 공간 안에 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다. 일단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숨소리로. 사무실에선 계속 기침을 하다가 가래를 모아서 뱉는다. 그 모든 것이 생중계되니 나는 너무 역겹다. 그러다 계속 하품을 한다. 하품 마지막엔 "하압~" 내뱉는 소리를 낸다. 마치 내 귀 옆에서 입김을 내뿜는 것 같다. 이어폰 볼륨을 아무리 키워도 소용없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면서 잔다. 소리도 소리지만 ‘도대체 윗사람이 되어서 업무시간에 코를 골면서 자기나 하고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으로 화가 나고, 그런 상황에도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는 이 거지 같은 사무실의 똥통 같은 분위기에 돌아버릴 것 같다.


퇴근할 때, 바로 뒤따라가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탔다고 엘레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고 가버리는 사람들. 어쩌다 다 같이 먹는 점심에도 혼자 밥을 먹는 것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핸드폰만 보면서 먹는 사람들. 문의 사항이 오면 파악하고 답을 해주면 끝나는 일을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증거들만 둘러대고 있는 그런 사람들. 뻔히 잘못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사람들. (적나라한 속 터지는 상황들이 있지만 그건 퇴사하고 쓰겠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루 중 가장 오랫동안 있는 곳이 얼마나 똥통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나태함과 회피로 얼룩져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면 모두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의욕이 없다. 어떤 누구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똥통에서 아무리 '나는 그러지 말자' 하며 노력해 봐야 나에게도 냄새가 밸 수밖에 없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은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일했었는데 정말 소름 돋게 나도 어느새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주말에 볼펜과 노트를 가지고 카페에 가서 고민해 보았다. 당장 이직을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은 있기로 했다. 결국 생각해 낸 해결책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휴대폰 위젯 화면에 D-DAY 기능을 띄웠다. D-DAY 타이틀은 ‘해방’. 계약이 올해까지니까 오늘 기준으로 168일. 정확하게는 앞으로 48일의 주말, 6일의 연휴, 5개의 연차와 3일의 여름휴가를 빼면 106일! 106일만 버티면 된다. 106일 동안 나는 다음 스텝을 위해서 공부하고 준비할 것이다. 이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결제했다. 이제 나의 해방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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