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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Aug 27. 2023

폭우 속의 속초 여행

3일의 여름휴가. 그 또한 숙제로 느껴질 만큼 무기력한 노잼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 보내고 싶기도 하면서, 간만에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가볼까도 생각했다. 1년 중 아무 때나 쓸 수 있기에 추석 연휴 앞에 휴가를 붙이면 저 멀리 지구 반대편도 가능했다. 몇 년만의 여행이니 돈은 신경 쓰지 말자는 관대한 마음마저 갖고 여행사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여긴 멀어서 시차 적응하기 힘들 것 같고, 여긴 더울 것 같고, 여긴 그냥 별로고…. 어느 곳 하나 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여행지가 없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있던 차에 결국 또 부모님 휴가에 얹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초등학생 땐 '애들이 중학생 되면 이제 같이 안 다닐 것 아니냐'며 얘길 했는데 마흔이 되도록 부모님과 여행을 다닐지 누가 알았을까? 


속초로 간다고 했다. 나는 속초를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과 산과 바다, 호수를 한 번에 볼 수 있고 뚜벅이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으니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기에 이젠 다른 곳을 가보고도 싶었지만, '여름휴가는 동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계신 부모님께 제시할 다른 대안은 없었다. 


막상 휴가를 냈지만, 여행이 별로 기다려지지는 않았다. 또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저녁엔 회를 먹고 시장에 들러 닭강정을 사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긋지긋한 회사에 안 가도 된다는 안도와 며칠의 해방감뿐... 그렇게 1박 2일의 짧은 속초 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의 첫 목적지는 역시 설악산이었다. 몇 년 전 먹고 내내 기억에 남았던 해물파전을 먹고, 케이블카를 탈 계획이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이틀 내내 비가 올 거라는 달갑지 않은 예보를 보았지만, 예보가 무색하게 설악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햇빛도 나지 않고 흐리기만 하니 다니기 딱 좋다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자욱하게 산을 감싸고 있는 구름 때문에 케이블카는 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해물파전과 도토리묵, 옥수수 동동주를 마시고 절에만 잠깐 들르기로 했다.


구름 속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해물파전과 도토리묵, 옥수수 동동주


해물파전은 몇 년 전 그때만큼 맛있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새 2만원이라는 사악한 가격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우리는 사찰로 올라가는 길에 커다란 불상에 소원을 빌고 셋이 사진도 찍었다.




신흥사 입구에 들어서자, 엄마는 화장실을 들르셨는데 그 사이 달갑지 않은 굵은 빗방울이 시작되더니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인당 우산을 하나씩 챙기긴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길에는 개울이 생긴 것처럼 물이 쏟아져 내려갔다. 아무리 심사숙고해서 걸어도 운동화는 젖어버렸고 걸을 때마다 물이 찌꺽찌꺽 나왔다. 빗소리에 서로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윗옷은 젖어 들며 살에 달라붙고, 청바지는 아래부터 젖으면서 그라데이션이 생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난리 통의 순간에 나는 오히려 활짝 웃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닥친 비에 홀딱 젖어버린 옷과 신발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그 순간 빗소리만큼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매일 예상 가능한 일상에 단비처럼 만난 진짜 살아있는 순간이었다.


비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많은 비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평소에 준비성이 꽤 철저한 편이지만 이번 여행엔 왜 이렇게 대충 온 것인지... 짧은 여행이라 여분의 바지도 챙기지 않았다. 일단은 빨리 숙소 체크인을 해야만 했다. 가려고 했던 숙소가 리모델링 중이라 처음으로 그 앞에 있는 카라반을 예약한 상황이었다.


비를 뚫고 도착한 카라반은 4인용이긴 했지만 아주 미니멀한 크기였다. 한쪽엔 더블 침대가 있고 반대편엔 2층 침대, 가운데는 싱크대와 식탁이 있었다.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이 좁았다. 비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커다란 빗소리 속에 갇혀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비 때문에 캠핑 같은 분위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청간정 카라반


옷과 신발에서 물을 짜내고 가져온 드라이기로 계속 말려봤지만, 마를 턱이 없었다. 저녁도 먹으러 나가야 하는데 말이다. 가기 전부터 저녁은 내가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하고 갔는데 맛집을 찾아가는 것은 포기하고 숙소 근거리에 있는 횟집을 찾아갔다. 차에 있던 아빠의 아쿠아 슈즈와 엄마 바지를 입고 말이다.




횟집에 들어가 앉으니, 창밖으로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속초에 도착해 그제야 제대로 바다를 보았다. 모둠회와 청하 한 병을 주문했다. 스끼다시가 푸짐한 상을 좋아하는 부모님께 별로 만족을 주진 못한 식사였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바가지라고 할 수는 없는 저녁을 먹었다. 엄마와 나의 잔엔 술을, 아빠 잔엔 물을 따랐다.


나 : 짠해야지~

엄마 : 같이 와줘서 고마워~ 짠!

다같이 : 짠!


모둠회


내가 차도 없고 딱히 어디 가고 싶은 곳도 없었기에 부모님 여행에 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와줘서 고맙다는 엄마 말을 들으니 조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휴가 전날 알고 지내는 동생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내가 이렇게 부모님과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이 앞으로 몇 번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비가 와서 여행은 엉망이 되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가져온 과일과 과자, 맥주를 놓고 언제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대화할 일이 있겠냐며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 비좁은 잠자리에 불편하게 몸을 뉘었다. 몸을 뒤척이기만 해도 카라반은 조금씩 흔들렸다. 사정없이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다음날 조금 비가 잦아들어 아침 겸 점심으로 감자옹심이를 먹으러 갔다. 강원도에서만 제대로 된 것을 먹을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비도 온 평일 점심에 당연히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고 음식도 거의 앉자마자 나왔다. 성글고 거친 듯 뭉쳐진 감자옹심이는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식감이 너무 좋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우리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시장을 구경하며 오징어순대와 닭강정을 사 들고 나왔다.


감자옹심이

그렇게 또 똑같은 여행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쉬워 요즘에 핫하다는 양양을 들르기로 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서피비치에 드디어 가보게 된 것이다. 기대감이 없었던 부모님께서는 서핑하는 젊은이들과 이국적인 풍경에 재미있어하시며 여느 커플들처럼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즐거워하셨다. 그리고는 주변 예쁜 카페에 들러 따뜻한 라떼를 마셨다.


양양 서피비치


"너랑 다녀야 이런데 커피 마시러도 오지. 네 아빠는 커피 한 잔 먹자는 소리도 안 한다니까?" 

 

가벼운 옷차림의 20대 젊은이들이 복작대는 카페에 나는 겨우 마른 눅눅한 옷에 헐떡거리는 아빠의 아쿠아슈즈를 신고, 엄마는 김장할 때 신는 장화를 신은 우스꽝스러운 차림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김영하 작가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가장 실패한 여행은 너무 순조로워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내내 순조로웠던 싱가포르 여행보다 딤섬 집을 찾아 길을 헤맸던 홍콩 여행이 더 기억에 두고두고 남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뻔하고 새로운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지긋지긋한 일상에 나는 길을 잃기를 열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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