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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Sep 02. 2023

돌싱녀의 연애 상담을 해준 건어물녀

그녀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몇 년에 한 번씩 연락이 오다가 자주 연락하게 되었을 때는 그녀가 이혼하기 얼마 전부터였고, 연락이 잦아진 것은 이혼하고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알고 있다. 그녀는 푸념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 그게 나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1년 정도 연락이 없길래 남자친구와 잘 지내고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얼마 전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갑자기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음… 솔직히 반가운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움이 더 컸다. 그녀와 만나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 10년도 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도 그녀가 온다고 했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틀어졌는데 이번에 또 이야기하는 것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숙제 같은 일이었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이 다가왔고 그녀를 만나자마자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전남편에게 보여주는 날이었고, 남친과는 싸워서 연락을 안 하고 있었고 혼자인 시간을 견딜 수 없어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을... 친구의 이야기는 기승전 남친 이야기로 이어졌고, 저녁에 술을 먹으러 갔을 땐 더 노골적이었다.

‘그래.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온통 남친 이야기만 꺼냈던 때.’


그녀는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했고 그 과정 또한 길고 힘들었는데도 또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또 결혼이 하고 싶다. 너는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아?”

“글쎄? 하면하고 말면 마는거지 그런 거에 대한 엄청난 갈망은 없어.”

“신기하다”

“각자가 갖고 있는 야망이 다르니까. 네가 나를 신기하게 생각하듯이 나도 네가 신기해.”


친구는 남친과의 연락 문제로 헤어지냐 마냐 구구절절 이야기했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속 만날 것 같구만 뭘 그래. 솔직히 헤어질 생각 없잖아. 진짜로 헤어질 거면 그런 소리 하지도 않고 그냥 끝내지”

“그건 그래“


TMI 가득한 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감정들이 떠올랐다. 무의미한 감정 소모들.

왜 연락을 안 해?

왜 걱정을 안 해?

왜 거짓말 해?

나는 이렇게 했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안 해?


예를 들면 친구가 약속 시간에 1시간 늦는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핸드폰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하며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남자친구가 늦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끓어올랐다. 왜 매번 나와의 약속을 똥으로 여기고 늦게 오는 것인지 그만큼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지… 그에게 종일 뾰로통했고 싸웠고 서로 지치고. 근데 결혼한 지 40년 된 엄마, 아빠도 그런 일들로 싸우는 거 보면 애정의 관계에선 어리나 나이 드나 대인배가 될 수 없는 것이 진리인가 보다.


내 삶에서 연애가 사라진 그간의 시간 동안 애정을 갈구하고 서운해하는 감정 소모가 없어서 심적으로 매우 평화로웠다. 덩달아 누군가에게 분에 넘치는 응원이나 사랑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연애 세포는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돌싱인 친구가 이런 건어물녀 같은 나에게 연애 상담을 해오다니 어지간히 얘기할 곳이 없었나 보다 싶으면서 연애도 부익부, 빈익빈이구나 하며 착잡했다.


중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간 그녀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애 둘을 둔 엄마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연애 고민, 남자들이 집적댄 이야기, 액세서리 쇼핑, 피부과 시술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참 이성에게 멀리도 떠나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 30대에도 그런 건 크게 관심 없긴 했지만… 나는 평일엔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며, 주말엔 산책이나 글쓰기를 하고, 글쓰기를 할 때 조금 더 엉덩이를 붙여보려 타건감이 좋은 기계식 키보드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우리의 관심사는 어느 한 곳 접점이 없었다.




이런 우리가 초등학생 때가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만났다면 과연 친구가 됐을까? 돌아보면 어릴 때도 우리는 친하게는 지냈지만 각자 노는 친구들은 달랐다. 나는 조용한 범생인 친구들, 그녀는 활발하게 노는 친구들. 그녀 주위엔 그때도 항상 남학생들이 서성였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사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아니라 초등학교 때 친구였던 지인이 더 맞는 표현 아닐까?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이렇게 건조해져 버린 나도 사실은 사랑받고, 사랑했던 때가 가끔 그립다고 스스로에게 고백했다. '언젠가는 하겠지'라는 여전히 무책임한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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