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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Mar 10. 2024

마흔두 살, 교정을 시작했다.

“윗니 하나가 없으시네요?”

“어릴 때 뭘 먹다가 부러졌는데 그걸 뽑았거든요. 근데 다른 이들이 자라면서 공간이 메워버려서 다시 난 영구치가 안쪽으로 덧니처럼 났는데 20대에 충치가 너무 심해져서 아예 뽑아버리게 됐어요.”

“그럼, 처음 뽑으신 게 몇 살 때예요?”

“7, 8살쯤이요”

"원래는 윗니가 아랫니를 덮어야 하거든요? 근데 너무 어릴 때 삭제된 치아라서 위쪽 공간이 작게 성장을 해서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커요. 균형이랑 공간을 맞추기 위해서 발치해서 진행하게 될 거예요. 중학생 때 교정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늦게 오셨네요."


마흔둘. 만 나이로 40살. 치아교정을 시작했다. 갑자기 이 나이에 무슨 치아교정이냐고? 발단의 시작은 2022년 12월에 한 크라운 치료부터다. 동네 치과에서 어금니 충치 치료를 2개 받으면서 크라운을 하게 되었는데 교합이 묘하게 불편했다. 그러면서 전에는 멀쩡했던 앞니가 서로 부딪히게 되고 앞니에 통증과 이물감에 시달렸다. 치과에 이야기하니 조정을 해주긴 했지만, 상관없는 앞니를 갈아내니 그것도 싫었고,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원장의 신경질적인 치료 태도도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다른 치과를 가보니 크라운을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백만 원 들여서 한 것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다시 한다는 것이 용납도 되지 않고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거니 하며 미련하게 버텼다. 


교합이 불안정해지면서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오른쪽 턱관절이 아파지고, 앞니에 통증까지 생겼다. 24시간 신경이 쓰이니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아주 오랜 숙제까지 덩달아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부정교합과 얼굴 비대칭이 있다.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였다. 나이가 들어 피부 탄력이 떨어지니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살면서 중요한 순간은 기억에 각인된다. 7, 8살 때쯤, 외갓집을 가는 고속버스에서 오징어인지, 옥수수인지를 먹다가 어금니가 하나 깨졌다. 그 후에 치과에서 뺀 기억이 선명하다. 내 치아는 대체로 고르게 난 편이지만 그 공간이 빈 채로 성장하다 보니 치아가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중심선이 틀어지게 됐다.


고등학생 때가 되자 서서히 티가 나기 시작했다.

”엇, 너 이가 삐뚤어졌다!“

친구들, 작은 아빠 내외가 이야기했다. 나는 최대한 웃지 않기로 했다. 웃으면 사람들에게 들키게 되니까. 그렇게 나는 무표정인 사람이 되었다.


18살 때, 처음으로 두근거리는 꿈 하나가 생긴다. 허파에 바람든 듯 나는 패션모델을 꿈꿨고, 프로필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진을 받으러 간 날, 사진작가는 또 내 이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입이 삐뚠데 한쪽으로만 씹지 말라고. 사진에 고스란히 내 쏠린 이가 찍혀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몰랐을 정도였던 것 같지만...). 고등학생인 내가 손수 전화를 걸어 스튜디오를 알아보고, 부모님을 설득해 프로필 사진을 찍었던 열의는 하얗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렵게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내 치아가 이래서 고민이고, 고치고 싶다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리고 그게 자기 탓이라는 것은 더 인정하기 싫어한다(아니면 돈 때문이었을까?). 고심 끝에 이야기를 꺼내 울음이 터진 나에게 엄마는 다그치며 말했다.

"네가 뭐가 어떻다고 그래! 한쪽으로 씹어서 그런 거지!"

어렵게 말을 꺼냈던 것에 비해 무참히 거절당한 나는 그냥 삐뚤어진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31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교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간 사회생활로 자금적 여유가 생겼고, 그때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와 혹여 결혼하게 되면 결혼 전에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큰 몫을 했다. 교정 상담 내용을 듣고 나는 교정을 포기했다.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임플란트, 하악 수술, 그리고 오른쪽 턱관절이 좋지 않으니, 교정을 받아도 된다는 대학병원 소견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하고 나서 지금보다 더 돌출 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냥 이번 생은 이렇게 살자며 단념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면 언제나 나의 콤플렉스를 적나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이거나, 비웃는 표정이거나 얼굴이 삐뚠 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얼굴 비대칭은 점점 심해졌다. 사람들과 마주 보며 대화하다 보면 내가 입이 삐뚤어진 채로 말해서 그런지, 균형을 맞추려는 본능 때문에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입을 한쪽으로 씰룩대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40대임에도 교정을 해야겠다고 용기 내게 된 것은 의외로 푸바오 작은 할부지 '송바오'님 때문이다. 처음 푸바오를 영상으로 접했을 땐 사육사님 치열이 좋지 않았다. 작년 여름쯤 쌍둥이 판다들이 태어났을 때쯤 교정을 시작하셨던 것 같은데 반년쯤 지났을 때 벌써 치열이 눈에 띄게 바르게 된 것이다. '40대에도 교정해서 바뀔 수 있구나!'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지금 교정을 해도 앞으로 수십 년은 바른 이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턱관절은 더 아파질 것이고, 이명도 심해지고, 앞니는 계속 자극 받다가 뿌리가 죽어버리거나 더 나이 들었을 때 쉽게 빠져버릴 것 같았다. 교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는 행동이 참 힘든 사람이다. 질질 끄는 것은 알아줘야 한다. 오죽하면 그 불편한 상태를 15개월이나 참고 있었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친구와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그 친구는 9년 전 교정을 받았다. 


친구와 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 카페에 가서도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예전에 교정했잖아. 요즘은 어때? 불편한 데는 없어?"

교정을 받고 나서 현재는 어떤지, 어디서 받았는지, 치과는 만족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오랜 시간 덮어놓고 있었던 고민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이 친구와 20년을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는데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다.


친구는 교정을 9년 전 시작해 1년 6개월 만에 끝냈다고 했다. 네 군데 상담 끝에 선택한 곳이었고 확신 있는 원장 선생님의 태도가 좋았다고 했다. 매우 만족하고 지금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때는 작은 치과였는데, 지금은 대형 치과가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위치가 우리 회사 근처였다. 친구는 고맙게도 상담받는데 같이 가주겠다고까지 했다. 바로 다음 주말에 예약을 잡아 상담을 받으러 갔다. 얼굴 사진, 엑스레이, 상담과 치료 방법, 비용 등을 듣고 결정한 뒤 치아 본을 뜨고 다음 예약을 하고 치과를 나섰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두려움보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가족 밴드에 교정을 시작할 것이라고 알렸다. 사실 나는 엄마를 원망했었다. 관리 좀 해주지. 그랬으면 가지런한 이로 살 수 있었는데 어릴 때 뽑아 버린 그 이 하나 때문에 얼굴 비대칭에 부정교합인 채로 살아버리게 됐다고. 그래서 꿈도 제대로 된 도전조차 못 한 채 접어버리게 됐다는 원망. 대학생 때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도 묵살해버렸던 엄마가 미웠다. 의사의 한마디가 계속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학생 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늦게 오셨네요."

중학생 때… 중학생 때….


내가 올린 밴드 글에 엄마의 댓글이 달렸다. 

‘부모가 무능해서 고생한다. 부모가 돼서 병원 한 번도 못 데려갔네. 미안하다.’

나는 원망과 용서의 눈물을 삼켰다.




작년 내내 변화라곤 하나 없던 지지부진 일상에 이골이 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변화해 갈 생각에 설렌다. 꽁꽁 숨겨왔던 뿌리 깊은 오랜 숙제를 꺼내 해결을 시작했다는 것이 기쁘다. 한때는 2, 30대에 갈필 못 잡고 방황하는 것이 '내 얼굴이 삐뚤어서 인생도 자꾸 궤도를 이탈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도 있다. 만약에 불편한 2개의 크라운이 아니었다면 나는 교정을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살았을 것 같다. 역시 불변의 진리. 인생사 새옹지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위, 아래 앞니 쪽에 교정기를 부착했다. 발치도 하나 했다. 어금니까지는 이번 달 안에 위-아래 순서로 부착한다고 했다. 앞으로 2년 동안 힘들고 귀찮고 아프겠지만 그 고통 자체가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라서 기쁘게 참고 받아들일 수 있다. 고민은 알리고 드러내야 해결할 수 있고,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악화되어 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글을 썼다는 것 또한 마치 고해성사한 듯 후련하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덩달아 삶의 중심 또한 찾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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