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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Nov 21. 2021

책상위 노란 오리인형이 주는 위로

러버덕의 끝나지 않은 여행

회사에서 아끼는 후배가 낙심한 표정으로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앉아 있습니다. 주변 동료들은 그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망설이다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고 지나갑니다. 반년 넘게 밤낮으로 애써가며 준비해온 프로젝트가 후배의 어이없는 실수로 좌절되었다고 합니다. 실수를 저지른 그 후배는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찌할지 모른 채 자리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해온 사람이 그 후배인 것을 알기에 다들 질책보다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합니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지금은 그냥 혼자 시간을 갖게 두는 것이 오히려 좋은 위로일지 모릅니다. 제 옆자리 동료는 그 후배에게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커피 쿠폰을 보내주는군요.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마음을 달래라는 배려인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에 스스로 자책하는 순간도 있고, 내 실수로 팀원들에게 피해를 끼쳐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도 회사의 큰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 실수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사업제안서 제출 마감 날짜를 제가 잘못 확인해서 팀원들이 애써 준비한 제안서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고 눈물이 펑펑 났었습니다. 그날 팀장님이 퇴근 후에 데려간 삼겹살집에서의 씁쓸한 소주 한잔이 아니었더라면 전 그날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벌써 10년 전 이야기네요.


후배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까 고민하다 그다음 날 그의 책상 위에 노란색 오리 인형을 놓아두었습니다. 말랑말랑한 노란색 오리 인형을 집어 든 후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욕실에서 아기들이 목욕하며 가지고 노는 오리 인형이 회사 책상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으니 이게 무슨 의미일지 궁금할 수밖에 없을 테지요. 지금부터 노란 오리 인형의 의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두들 노란 오리 고무인형 하나쯤 욕실에서 가지고 놀았던 기억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2014년 잠실 석촌호수 나타났던 초대형 오리 풍선인형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당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둥둥 떠있던 27미터 높이의 대형 오리 인형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었습니다. 석촌호수에서 한 달 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며 헤엄치던 오리 풍선인형은 네덜란드 예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설치미술로 전 세계 여러 곳에 대형 오리 인형을 띄어온 러버덕 (Rubber duck)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2007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브라질, 일본, 미국, 호주 등 전 세계 20여 개국을 돌며 사람들에게 어렸을 적 욕조에서 함께 놀던 러버덕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작은 욕조안에서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며 나를 지켜주던 작은 러버덕이 훌쩍 커진 모습으로 호수나 강 위를 떠다니는 모습은 어린 시적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러버덕은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안타까운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1992년 1월 10일. 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유독 매섭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중국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만들어진 29,000 마리의 러버덕들은 다른 고무 장난감 친구들과 함께 컨테이너에 실려 홍콩에서 미국으로 긴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의 긴 여정이었지만 함께하는 장난감 친구들이 있어 많이 외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란 러버덕과 함께 한 친구들은 빨간 비버, 초록 개구리, 그리고 파란 거북이였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게 되면 이제 미국의 어린이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욕조를 떠다니게 될 생각에 모두들 힘든 여행을 잘 참으며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으로 배에 실린 12개의 컨테이너가 그만 북태평양 바다에 빠져버렸습니다. 그중에 한 컨테이너에는 러버덕과 친구들이 실려있었답니다. 바다에 떨어진 컨테이너의 문이 파도에 휩쓸려 열리고, 29,000마리의 러버덕과 친구들은 폭풍우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북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러버덕. 그 이후 길 잃은 러버덕들의 외로운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이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욕조를 헤엄칠 상상을 하던 러버덕들은 이제 차가운 바다 위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자만의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10개월 후 11월 16일, 미국 알래스카 해변가에서 관광객들이 떨어뜨린 동전이나 귀걸이 등을 주우며 용돈벌이를 하던 한 할아버지의 눈에 열 마리의 노란 러버덕들이 띄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점에서 무려 3,200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었는데요, 이후 열흘이 지난 28일에는 백여 마리의 러버덕들이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1993년 8월까지 알래스카 해변에서는 총 400마리의 러버덕들이 발견되었답니다.


북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러버덕들이 알래스카 해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애틀의 해양학자 커티스(Curtis Ebbesmeyer)와 제임스(James Ingraham)는 이 소식에 손뼉을 치며 알래스카로 달려갔습니다. 수만 마리의 러버덕이 조류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해양조류를 연구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이거든요. 러버덕들이 조류를 따라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추적하면, 태평양 조류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기존에 이들이 해양 조류를 연구하던 방법은 기껏해야 백여 개의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우는 방법이었어요. 하지만 유리병을 주워서 그 안에 편지를 보고 응답을 해오던 비율은 고작 1%도 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무려 28,000마리의 오리들이 태평양을 떠돌고 있다니! 커티스와 제임스는 그때부터 이 오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러버덕들이 길을 잃은 지 3년 후, 러버덕들이 일본의 해안가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러버덕은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 이제 아시아 쪽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약 19,000마리의 러버덕들은 인도네시아와 호주 등 남반구 방향으로 까지 흘러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중 수백 마리가 호주 해변가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몇 러버덕들은 북극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극의 빙하 사이에서도 러버덕이 발견되었고, 꽁꽁 얼은 채 빙하 안에 갇힌 오리들도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에는 스코틀랜드 서쪽 해변가에서도 러버덕이 발견되어, 조류가 북극을 거쳐 그린란드를 지나 대서양까지 흘러들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처음 스코틀랜드 해변가에서 러버덕을 발견한 사람은 이 러버덕이 얼마나 중요한 발견 인지도 몰랐다고 하네요. 당시 휴가 중이었던 그 사람은 호텔에 돌아가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중, 이를 알게 되어 부리나케 해변가를 다시 뒤졌다고 합니다


러버덕들의 외로운 여행은 이제 해양조류 연구에 너무나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러버덕들은 그동안 풀지 못했던 조류의 흐름에 대한 많은 해답을 가져다주었고, 커티스와 제임스의 연구를 통해 이제는 조류의 흐름을 예측하는 모델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러버덕 들의 외로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직 수천 마리의 러버덕들이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된답니다. 처음 러버덕을 만들었던 장난감 회사에서는 이제 러버덕들을 구해내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었다네요. 러버덕을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한 마리당 150불의 상금을 준다고 합니다.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러버덕에 대한 소식은 이제 해양 조류학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답니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인 에릭 칼 (Eric Carl)은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10 Little Rubber Duck"이라는 동화를 발표했답니다. 동화에서 러버덕들은 실제 일어난대로 배에서 떨어져 서로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서 겪게 되는 다양하고 신나는 모험이 동화를 통해 생생히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답니다. 러버덕들은 비록 원래 소원대로 아이들과 함께 욕조에서 헤엄치지 못하지만, 이렇게 동화를 통해 전 세계 아이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동화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세계 각지에서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러버덕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축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축제가 바로 "Rubber Duck Race"입니다. “Derby duck race"라고도 부르는 이 경주는 수만 마리의 러버덕들을 흐르는 강에 풀어놓고 어느 오리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지 겨루는 축제로, 현재 세계 수백여 장소에서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경주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리는 Freestore Foodbank Rubber Duck Race인데요, 무려 100,000마리의 러버덕이 경주를 한다고 합니다. 1994년에 처음 시작된 이래 이 축제를 통해 4천6백만 달러의 모금액이 모였고, 작년 한 해에만 50만 불의 기부금을 모았다고 합니다


차가운 바다 위에서 러버덕들이 길을 잃은 지 이제 30년이 다 되어가네요.. 제가 러버덕을 통해 후배에게 주고 싶은 위로는 러버덕의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지금의 실패와 좌절이 내일의 실패는 아닙니다. 그 후배의 실수가 앞으로 그 후배의 인생에 값진 교훈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팀과 회사는 그 후배의 실수 덕분에 더 큰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실패라고 정의하는 것들은 지금이라는 시간에만 국한되는 정의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버려진 러버덕은 그동안 차가운 바다 위에서도 아이들에겐 동화책을 통해 상상의 꿈을 가져다주었고, 과학자들에게는 귀한 지식을 가져다주었으며, 어른들에게는 러버덕 경주를 통해 재미와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늘 후배의 우울한 표정이 러버덕의 환한 웃는 표정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며 온 마음을 다해 후배를 응원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후배의 튀어나온 입이 러버덕을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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