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한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던 행운목에 꽃이 피었습니다. 2년 전, 사무실 이전 때 어디선가 축하한다며 보내준 행운목이었을 텐데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구석자리인지라 사람들도 거기에 화분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투박하고 굵은 나무줄기에 하얀 꽃이 피어나자 행운목 앞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복사실에서 A4용지를 한 묶음 들고 오던 김 부장님도 탕비실에 간식거리를 찾아가던 최대리도 행운목 앞에 들려 그 진한 향기를 맡고 갑니다. 점심식사시간에도 행운목의 하얀 꽃은 단골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꽃이 다섯 개였는데 오늘은 일곱 개더라, 어제는 순백의 하얀색이었는데 오늘은 꽃뿌리에 분홍빛이 들었더라 등, 행운목은 직원들 사이에 가장 큰 이슈인 듯합니다. 행운목의 하얀 꽃이 팍팍하고 바쁜 직장생활에 소소한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눈부신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행운목을 바라보기도 하고 꽃향기가 더해진 사무실 공기를 들이마셔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에는 이런 소소한 위로 거리가 있으신가요? 책상 위에 둔 작은 선인장 화분이나 모니터 옆에 붙여둔 귀여운 고양이 사진들도 여러분의 바쁜 일을 멈추고 얼굴에 작은 미소를 짓게 하는 위로 거리들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또 하나의 위로 거리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무려 한 나라의 모든 국민들에게 위로이자 상징이 된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7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분주한 작은 섬, 홍콩. 아침저녁이면 이 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그리고 가정을 향해 가느라 길거리를 가득 매우곤 합니다. 분주한 홍콩 시내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 중에 하나가 침사추이(Tsim Sha Tsui)라는 곳인데요, 홍콩에서도 가장 번화하고 여행객과 홍콩 시민들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곳이지요. 홍콩섬, 마카오,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항구와 수많은 오피스 빌딩들,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홍콩의 활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침사추이입니다.
이런 분주한 침사추이의 하루하루를 졸린 눈으로 지켜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침사추이의 작은 편의점에서 살고 있는 브라더 크림 (Brother Cream)이라고 불리는 고양이입니다. 3평 남짓한 편의점에 터를 잡고 앉아 분주한 홍콩의 일상을 지켜보는 이 고양이가 바로 홍콩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고양이 크림입니다. 마치 가게의 주인 마냥 가판대 한가운데 자리 잡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 크림의 하루는 대부분 빈둥대는 것이 대부분이랍니다. 가판대 위에서 빈둥빈둥, 가게 바닥에 누워 빈둥빈둥, 창고 깊숙이 들어가 빈둥빈둥... 그러다 보니 누가 봐도 비만 고양이지요. 늘 작은 편의점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운동량도 적습니다. 편의점 밖 세상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분주한 도시 홍콩이지만, 이 작은 편의점 안 세상은 뒹굴거리는 크림으로 인해 남태평양 휴양지나 다름없답니다.
편의점의 게으른 고양이 크림. 크림은 어떻게 홍콩의 국민 고양이가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홍콩 시민들은 크림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도시 홍콩. 그 속에서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홍콩 시민들에게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크림의 여유로운 모습은 일상의 여유를 떠올리게 한다고 합니다. 바쁜 출근길에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르다가도 신문을 사기 위해 들린 편의점에서 마주치는 크림의 모습은 홍콩 시민들의 발걸음을 잠시나마 늦추게 한답니다. 흰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는 지나가는 홍콩 시민들에게 다그치듯 말을 건네죠.
"자네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가~옹"
크림이 살고 잇는 침사추이라는 곳의 위치도 홍콩 시민들에게 크림이 알려지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침사추이는 홍콩에서 가장 번화한 곳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교통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홍콩 시민들의 출퇴근길에 크림을 마주치는 일이 다반사 이죠. 그래서 직장 동료들과 첫인사로 "오늘은 크림이 계산대에 누워있던걸?" "오늘 크림 봤어?"이라고 건네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2년 7월 10일. 크림이 사라졌습니다. 편의점 주인이자 크림의 주인인 코치 씨가 하루 종일 크림을 찾아 해 멨지만 크림이 좋아하던 성인잡지 가판대에도, 크림이 낮잠을 자던 창고 안에도, 크림의 비밀장소인 맥주 박스 안에도, 크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크림을 납치했간 것이었습니다.
홍콩의 국민 고양이 크림의 실종은 크림을 사랑하는 홍콩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크림의 실종 소식은 홍콩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크림을 찾아 나섰어요. 정신없이 땅만 보며 출퇴근을 하던 홍콩 시민들은 크림을 찾기 위해 시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크림을 찾기 위한 노력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페이스 북에는 크림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댓글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크림을 찾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림과 비슷하게 생긴 길고양이라도 발견되면 순식간에 크림의 페이스북에 신고 댓글이 쇄도했죠. 모두가 간절히 크림이 되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크림이 실종된 지 26일째 되던 날. 침사추이의 좁은 골목길에서 드디어 크림이 발견되었습니다. 비에 젖은 몰골로 발견된 크림은 몸무게가 3파운드나 줄어든 채 골목길에 웅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유명해진 크림을 몰래 훔쳐갔다가 크림을 찾는 사람들의 눈이 많아지자 이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하네요.
"브라더 크림이 돌아왔다!"
크림이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이 홍콩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홍콩 신문의 1면이 크림의 뉴스로 도배가 되었어요. 크림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홍콩 시민들은 이 기쁜 소식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수다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크림을 잘 모르던 홍콩 사람들도 미디어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크림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크림의 실종사건과 돌아온 크림. 이제 홍콩에서 크림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크림은 명실상부한 "홍콩 국민 고양이"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크림은 이제 엄청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크림에 대한 이야기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순식간에 홍콩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크림의 책에 대한 인기는 가판대에서 잠자던 크림을 사인회장으로 끌어내게 만들었네요. 크림은 홍콩에서 가장 큰 쇼핑몰에서 사인회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게으른 크림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해 사인을 했을까요? 사인회에 모인 사람들은 크림의 발 모양을 본뜬 도장으로 크림의 사인을 대신 받아갔다고 합니다^^
"아 귀찮다냐옹... 그냥 내발 도장으로 찍어라~옹"
크림은 광고 모델로도 섭외 1순위가 되었습니다. 3대 관광버스 회사 중 하나에서는 크림을 회사의 대표 모델로 섭외해서 수백 대의 버스를 크림의 사진으로 도배를 했다는군요. 이제 홍콩 시내에서 크림의 얼굴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죠. 그뿐 아니에요. TV에서도 크림은 광고 모델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답니다.
크림은 이제 자체 캐릭터 상품까지 출시하게 되면서 유명세뿐만 아니라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게 되었습니다. 편의점 가판대에서 뒹굴거리며 밥만 축내던 크림이 이제 편의점의 수익에 몇십 배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크림의 유명세는 이제 외신에도 소개되면서 글로벌 스타가 될 기회도 잡게 되었습니다. CNN에 인터뷰까지 초청된 크림은 시크한 표정으로 전 세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인터뷰하는 동안 크림은 느릿느릿 스튜디오를 휘젓고 다니며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답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들도 크림이 걱정되실 것 같아요. 바쁜 스케줄에다가 크림을 보기 위해 편의점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크림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크림의 주인아저씨도 사람들에게 크림을 쓰다듬거나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 찍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은 편의점이 아니라 집에 머물게 해서 크림이 편히 쉬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침사추이의 편의점에서 늘어져있는 크림. 홍콩 사람들의 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크림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가판대 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크림의 주인아저씨는 크림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금을 모두 길고양이를 위한 자선단체를 세우는데 기부했다고 합니다. 크림의 이름을 딴 브라더 크림 재단이란 이 자선단체는 홍콩의 길고양이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선활동으로 크림은 홍콩 시민들로부터 더욱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국민 고양이 크림. 바쁘고 분주한 홍콩의 일상에서 여유와 친절을 일깨워주는 크림은 칠백만 홍콩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홍콩인들은 우울한 일이 있을 때 크림이 신문 가판대 위에 늘어져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금세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고 합니다.
홍콩인들 못지않게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상의 위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위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작고 평범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사무실 구석에 방치되듯 있던 행운목일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지나친 작은 고양이 일수도 있습니다. 힘들고 위로가 필요할 때, 한번쯤 주변을 둘러보고 평소에 지나쳤던 것들에 관심을 주면 어떨까요?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의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국민 고양이 크림처럼 유명하지는 않아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p.s. 브라더 크림은 안타깝게도 지난 2020년 5월에 주인아저씨의 품에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홍콩 시민들은 그날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크림이 하늘나라에서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제 침사추이의 편의점 가판대에서 크림을 만날 수 없지만 홍콩 시민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크림이 남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