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떠난 여름휴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녀. 눈에 띄게 하얗고 긴 목선이 내 오래전 기억 속 그녀임을 기억나게 했다. 15년 전, 요즘 말로 썸이라 할 수 있는 설렘 가득했던 시간을 보내다 각자의 인생길을 따라 자연스레 연락이 끊긴 후 처음 마주친 그녀였다.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한 저녁식사와 도시의 밤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지난 15년간의 인생 이야기는 깊어지는 어둠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둑해진 테이블 위에 낮고 무겁게 깔렸다. 그녀는 와인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와인잔 여기저기 남겨진 그녀의 지문에 테이블 위 촛불이 뿌옇게 어른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없이 고민하는 내 손위로 그녀의 차가운 손이 얹어졌다.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흰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테이블 위 무거운 공기를 흩어버렸다. 난 큰 숨을 들이마쉬고 가슴속 갑갑했던 공기를 바람 곁으로 내보내었다.
한 손에는 반 정도 남은 와인병을 들고 한 손에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호텔을 향해 해변가를 따라 걸었다. 고르지 않은 모래에 발을 디딛을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기대었다. 호텔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모래 위에 정성 들여 발자국을 남기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호텔 입구에서 아무 말 없이 신발의 모래를 털어내던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 와인마저 마실래? 내 방에서”
노곤해진 몸을 택시 뒷좌석에 기대며 어둠이 내린 거리를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눠준 세월의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얹어진 것 같아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쐬었다. 조금 전 호텔방에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던 그녀의 등에는 가방이 닿은 자리를 따라 땀이 축축하게 배어있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땀을 닦아내는 동안 난 조용히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돌아갈 것이라는 걸. 그녀 인생의 무게까지 품어주기에 난 이미 너무 영악하게 늙어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