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출근했더니 직원들 책상 위에 웬 소주잔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오늘 저녁에 회식이 있긴 한데, 소주잔이 아침부터 그것도 일하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건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그리고 소주잔에는 ‘로또 당첨’, ‘다이어트’ 같은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
“아 그거 인사부 김대리가 준비한 거예요. 너무 센스 있지 않아요?”
작년 연말 워크숍에서 인사부 김대리는 직원들에게 한해 목표했지만 이루지 못한 아쉬운 것을 네 글자로 적어서 내라고 했었다. 김대리가 그 종이에 적힌 것들을 소주잔에 새겨서 각자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이다. 작년에 이루지 못한 그 목표를 포기하지 말고 올해는 꼭 이루 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 종이들 캠프파이어하면서 다 태운 거 아니었어?”
“아, 태우는 척하면서 몰래 챙겨놨었데요. 깜짝 이벤트 하려고”
역시 김대리는 감성적이다. 나 같은 INTJ 부류는 저런 낯간지러운 이벤트는 생각도 못했을 텐데. 직원들은 다들 자기 책상에 놓인 깜짝 선물에 감동한 듯하다. ‘폭풍 연애’라고 적힌 소주잔을 들고 노총각 최 과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김대리의 저런 섬세한 감성과 배려에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 나에겐 없는 그녀의 섬세함이 내가 그녀에게 빠졌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와 난 아무도 몰래 일 년간의 사내연애를 해오다가 지난달에 직장 선후배 관계로 돌아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쿨하게 작별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나의 이별통보에도 그녀는 상처받지 않은 듯 좋은 직장 선후배 관계로 만나자고 말했다.
그녀의 신선한 이벤트에 사무실이 훈훈해졌다. 난 웃으며 내 책상 위의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뭘 적어 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투명한 소주잔에 궁서체로 새겨진 네 글자를 한 글자씩 읽으며 난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작년 연말 워크숍. 난 직원들이 한잔씩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느라 엄청 취했었다. 다들 내년에는 연애만 하지 마시고 결혼도 하시라는 덕담을 건넸었다. 난 어차피 결혼 생각은 없으니 그냥 화려한 연애만 하겠다고 했고, 김대리는 나를 놀리며 그러다가 애인이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결혼하시는 거 아니냐고 했었다. 난 속도위반 결혼은 절대 싫다며, 결혼도 안 할 거 차라리 안전한 남자가 되겠다고 했었다. 잊고 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소주잔의 글자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정. 관. 수. 술
“오늘 회식 때 다들 그 소주잔 들고 네 글자 건배사 외치셔야 해요. 소주잔 잊지 말고 챙겨 오세요”
김대리가 싱글 생글 웃으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내게 차가운 미소를 날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