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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22. 2022

손절하라는 그 말이 불편하다.

'이런 사람들은 손절하세요.'

'내 주위에 이런 사람 있다면 빨리 손절하세요.'

'이런 친구와는 손절해야 한다.'


요즘 왜 이렇게 손절하라는 글과 동영상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글이나 동영상이 많은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손절'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왜 그렇게 손절하라는 것인가?


손절은 관계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거슬리니까 너와의 관계는 끝' 해버리면 아주 쉽다. 하지만 이 쉬운 방법이 과연 최선일 지는 의문이 든다. 사람과의 관계는 이진법이 아니다. 10진법, 100진법, 혹은 수 백만 진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싹둑 잘라내듯 손절하라는 것은 과연 '나'를 위한 것일까, '그'를 위한 것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전제를 두고 관계를 설정하고 싶다. 내가 국민학교 때 보았던 용석이는 30년이 지난 지금의 용석이와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30년 동안 수많은 자극을 받으며 경험이 쌓였고 그로 인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30년 전 본 기억 속 용석이를 대하듯 '걔는 이런 이런 사람이야'라고 쉽게 단정 짓고 30년 후에 만난 용석이를 대한 다면 그것이 정말 내가 용석이를 대하는 것일까 내 머릿속 허상인 용석이를 대하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무수히 많다. 하지만 내가 상처받은 그 모두를 손절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변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매번 만날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콕콕 쑤시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렇게도 상처를 주는 식으로 말을 할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과 그 사람이 처한 환경, 이런 것들을 고려해 보면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 사람 환경이 그 사람을 뾰족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이 당장 나의 삶에 황폐함을 가져다 줄 정도로 악영향을 끼친다면 그 사람이 변화할 때까지 일단은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아예 배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하는 '손절'해야 할 사람에 누군가를 넣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인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사람을 부류로 정하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내가 감히 그 어떤 이를 '이런 부류'라고 정하고 손절 목록에 넣는다면 그것은 오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 사람이 변화하는 데 시간이 적게 걸릴지 많이 걸릴지의 차이라고 본다.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상처를 주는 사람은 일단 피하는 게 맞지만, 그 사람이 나중에 나락으로 떨어진 나를 위해 손을 건넬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관계 단절' 보다는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두고 사람을 대했으면 한다.

 

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 힘으로 감당이 안되면 일단 관계 휴식기를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손절'이라는 단어로 함부로 누군가를 낙인찍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섣부른 판단과 오해가 누군가에게 또 커다란 상처로 남지 않도록 '손절'이란 말을 쉽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고 서로 회복해 나가는 관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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