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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28. 2022

고통 없이 죽고 싶은 건 인간만이 아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그들의 고통을 묵인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들의 지능이 인간의 것보다 낮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학대이다. 인간만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에게도 동물권이 있다.




이민 생활을 하면 한국의 음식과 한국의 맛이 그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맛집 탐방이나 식도락을 주제로 한 프로를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때가 가끔 있다. 아직 살아 있는 꿈틀거리는 낙지를 펄펄 끓는 국물에 집어넣는다던가, 살아 움직이는 게를 찜통에 넣는 장면은 차마 보기가 불편하다.


한국도 동물복지나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려동물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내가 키우고 있는 개와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 전반에 대한 관심이 더 주어지길 바라고 있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모든 고기를 먹고, 모든 바다 생물도 식용으로 먹는다. 하지만 식용으로 먹는 동물과 바다 생물에 대해서도 그 취급에 있어서 만큼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처신하고 싶다. 남편은 낚시를 즐기는데 낚시를 스포츠로 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가족들의 먹거리를 위해 낚시를 한다. 손맛을 위해 낚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끼 식사 거리를 위해 낚시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잡은 고기를 처리할 때면 많은 죄책감이 든다.


호주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하는 고기던, 바다 생물이건, 살아 있는 채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요리 방식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최소한의 고통으로 도축을 하고 바다 생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게는 냉동실에 넣어 죽게 한 후 요리를 하고, 문어나 낙지도 펄펄 끓는 물에 넣지 않고 죽고 나서 요리를 한다. 살아 있는 산 낙지는 절대 먹을 수 없고, 낙지 탕탕이 같은 요리는 여기선 절대 볼 수 없다. 호주에선 그만큼 동물의 고통 없이 죽을 권리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한 동남아 국가에서 소를 망치로 죽이는 영상이 문제가 되어 그 나라에 소 수출 금지까지 내리기도 했다.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에 나오는 어미 게는 알을 품고 간장이 스며들며 죽는다. 그 시를 읽고 많은 독자들은 더 이상 간장게장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장게장은 꼭 활게로 담아야 하는 것일까? 간장게장은 꼭 알 품은 암게만 맛있는 것일까?


호주에선 활게를 요리에 사용할 수 없다. 암게도 법적으로 잡을 수 없어 간장게장 담을 땐 모두 수게뿐이다.

알 품고 죽음을 맞이하는 암게의 시를 호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음식이 되어가는 과정에 그 생물이 느끼는 고통이 첨가되지는 않는다.


고통은 인간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동물에게 인간의 언어가 주어지지 않아서 뿐이지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강아지와 고양이뿐 아니라 바다에 사는 가재와 문어, 낙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소리치지 않는다고 고통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고통을 묵인하는 학대이다.


식용으로 사용하는 생물이라 하더라도 그 취급에 있어서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어릴 적 재래시장에 엄마를 따라가 아나고 회 뜨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아직 살아서 퍼덕이는 기다란 붕장어를 도마 위에 마련된 못에 머리를 꽂고 껍질을 벗기고 회를 떠서 접시 위에 내놓았다. 접시 위의 하얀 물고기 살점이 아직도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속에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고통 없이 죽고 싶은 건 인간만이 아니다. 모든 동물과 생물도 고통 없이 죽을 권리가 있다. 설령 식용으로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고통 없이 죽을 권리만큼은 보호해 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사진 출처: National Geograp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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