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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05. 2022

<표정 사용 설명서>라도 있어야 할까?

코로나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호주인 친구들이 가끔 내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표정이 없어? 화가 난 사람들 같아. 너무 무표정이라 다가가기 힘들어."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부인하고 싶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웃음도 많고 잘 놀고 재밌는데 저런 말을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나부터 그런 무표정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사실 딱히 누군가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난 무표정에 가까웠다. 짧은 내 추측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굳이 혼자인 상황에서 표정을 다양하게 지을 일들이 그리 많을까 하는 반항심도 솟았다. 그렇다면 호주 사람들은 똑같이 혼자인 상황에서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을까?


딱히 혼자 있을 때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웃어주는 게 호주 사람들이다. 이것이 친구가 말한 한국 사람들과 호주 사람의 차이점이다. 한국 사람은 사람이 지나가도 그 사람과 눈조차 맞추길 꺼린다. 제 하던 일을 하며 그대로 지나가기가 일쑤다. 하지만 많은 호주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웃음을 지어주고 인사를 건넨다. 아마 내 친구는 그런 호주 사람과 대비되는 한국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말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 사람도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본연의 애정이 식은 세상이 된 탓일 수도 있고, 마이크로화 되어가는 인간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마스크에 표정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주는 한국만큼 마스크 쓰기에 열심인 나라는 아니지만, 한동안은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모두 마스크를 쓰도록 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눈만 남은 애처로운 얼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표정을 읽는다는 것도 어려웠고, 표정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일까? 요즘 만나는 아이들은 표정이 이상하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은 입으로는 'Hi'라고 하면서도 표정은 없다. 마치 통나무를 대하는 느낌이고, 내가 통나무가 된 것 같았다. 수줍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활발하고 말도 많은 아이다. 말은 많은데, 말의 내용과 표정이 매치가 안된다. 환하게 웃으며 말해야 하는데도 아주 무덤덤하게 말하고 느낌을 잃은 표정이다. 물론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이런 표정 없는 아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표정을 읽는 법은 물론이거니와 표정 짓는 법까지 배우지 못한 슬픈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물론 언제 어디서나 방긋방긋 웃는 진정성 없는 표정을 배우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식적인 표정은 무표정보다 더 힘들다.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웃픈 상황이 있는데, 공공기관이나 병원에서 날 부를 때, 기계적으로 올라간 입꼬리와 영혼 없는 눈빛으로 'xxx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인사이다. '님'자까지 붙여 내 이름을 붙여주지만 대접받는 느낌도 아니고 환영받는 느낌도 아니다. 차라리 예전처럼 'xxx 씨, 들어오세요.'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표정과 감정이 따로 놀고, 입으로 튀어나온 말까지 부조화를 이룬 인사는 영 받기가 어색하다. 물론 무례한 인사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인사를 할 때만큼은 그 사람에 대한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무엇이 이들의 표정을 앗아간 것일까? 간단한 인사에조차 마음 담지 못하고 기계적인 음성과 기계적인 표정을 담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얼굴에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은 시대 탓으로 표정을 익힐 기회를 빼앗겨 버렸고, 어른들은 무언가에 짓눌려 표정 짓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표정 사용 설명서'라는 책이 나와야 할 것만 같다.


표정은 내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속 감정이 안면 근육에 전달되었을 때 표현되는 사소한 근육의 움직임을 나의 눈으로 인식해서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표정을 가르쳐 줄 타인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가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보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시대에 표정이란 것은 한낱 불필요한 것이 되어 퇴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표정의 사소한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자연스러운 표정은 나의 얼굴에도 나타난다.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있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둔감한 세상을 살면서 표정을 익히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타인에게 눈을 돌려야만 나의 표정을 가질 수 있다. 나만 바라봐서는 나의 표정을 가질 수 없다.


자판 대신 손을 잡고, 화면 대신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야 인간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영영 우리의 표정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거울만 보지 말고, 화면만 보지 말고, 다른 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면 살아있는 표정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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