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향기 Sep 14. 2022

호주 봄, 달콤하고 쓰린 재스민 향

호주는 봄이다. 재스민 향이 창가에 스미는 계절이다. 겨울 공기가 옅어지고, 봄 공기가 그 자리를 메우면 담장에 초록잎으로만 무성했던 재스민이 꽃을 하나 둘 피워낸다. 재스민 향이 열어둔 창문으로 전해지면 내 마음에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던 그때가 다시 떠오른다. 코 끝은 재스민 향이 가득했지만 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움큼의 잠도 청하지 못했다. 뜨거운 물에 마음이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닥거렸다. 쓰라렸다. 마음의 살점은 뭉그러지고, 진물이 났다. 그러다 문득 아홉 살 어린 내가 추억처럼 떠올랐다.


겨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냉랭한 부엌의 커다란 찜통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 속 하루의 온기는 찜통에서 흘러나오는 김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연탄불 위에서 끓지도 않고 김만 모락모락 피는 찜통은 우리 식구의 더운물 담당이었다. 그때만 해도 안동 촌구석 수도에서 더운물이 나온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게 아침이면 찜통의 뜨거운 물을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바가지로 옮겨 날라 찬물과 섞어 겨우 냉기만 면한 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위험천만한 일인데, 그때는 매일 아침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옮겨 나르는 일이 당연한 일이었다.


뜨거운 물을 나르는 일은 아침마다 엄마가 해 주시는 일이었는데, 아홉 살이었던 나는 일요일 아침 모든 식구들이 늦잠 자고 있던 틈을 타 호기롭게도 내 힘으로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아직 팔 힘이 세지 않은 아홉 살 나에게 물을 담은 바가지는 너무 무거웠다. 거의 목욕탕에 다다랐을 때쯤 간신히 버티던 내 손은 힘이 풀렸고, 그만 바가지 물을 내 다리에 쏟고 말았다. ‘앗 뜨거워!’ 소리에 놀란 엄마와 아빠가 달려 나오셨고, 생각보다 화상은 깊었다.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화상의 부위가 너무 넓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 있는 날이 길어지고 아홉 살 꼬마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를 즈음, 아빠가 책 한 권을 가져오셨다. 무슨 재미난 동화책이라도 되는가 싶었는데, 작은 글씨만 빼곡한 누런 종이의 조그만 책이었다. 아빠는 그 책이 괴테의 ‘파우스트’라고 하셨다. 아빠는 오늘부터 이 책을 읽어줄 테니 잘 들어보라고 하셨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홉 살짜리 꼬마가 듣기에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화상 부위가 뜨겁고 아파 견디기 힘들었지만, 아빠가 읽어주시는 ‘파우스트’를 듣고 있을 때면 내가 화상을 입은 것도 완전히 잊은 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읽었던 어떤 동화책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아빠는 매일 퇴근 후 병원으로 찾아오셔서 ‘파우스트’를 읽어 주셨고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길었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했다. 내 상처가 아문 것은 다 아빠가 읽어준 '파우스트' 때문이라 생각했다.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날라야 하는 그 집을 떠나 산 지 20년이 되었을 무렵 내 마음에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의사는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내려주었다. 화상의 범위가 너무 넓어 입원해야 했던 아홉 살 때처럼 혼자 마음의 화상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감당할 수 없는 바가지의 뜨거운 물을 들고 휘청거리던 어릴 때의 나처럼,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읽어 주시던 ‘파우스트’가 생각났다. 치료제를 찾듯 나는 다시 책을 찾았다. 그렇게 '월든'이란 책이 내 손에 선물처럼 쥐어졌고, 어린 아홉 살 꼬마가 '파우스트'에 상처를 다독이듯, 데이빗 헨리 소로우의 글로 내 마음을 다독여갔다.


재스민 향이 창가에 스미는 계절이 되면 그렇게 휘청이던 내 모습들이 떠오르고, 화상에 힘들었던 어린 내 다리가, 쓰라렸던 내 마음이 느껴진다. 달콤한 향 속엔 늘 쓰라린 상처가 드리워져 난 재스민향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


하지만 하얗게 피어나 담을 뒤덮은 재스민을 바라보면 나의 상처를 하얀 꽃처럼 감싸준 사람들과 책들이 생각나고, 그들이 어루만져 주던 내 상처가 이제는 아물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재스민 꽃 사이로 꿀벌들이 날아다닌다. 꽃은 벌과 꿀도 나누고, 향기도 나눈다.

나도 그들 사이를 날아다녀야겠다. 꿀도 나누고, 향기도 나누어줄 사람들과 책들 사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