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을 돌려줘, 물'레'방아 돌리듯.

by 나무향기

'레'미콘이 돌아가면 신기했다. 커다란 트럭에 커다란 반죽기처럼 생긴 믹서가 돌아가고 있는데, 그 안에서 시멘트가 찰진 반죽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빵이 되기 전 열심히 섞이는 반죽이 차 위에서 돌아가는 것만 같아 레미콘을 보면 늘 빵 냄새가 났다.


난 오래도록 레미콘이 돌아가는 커다란 통이 달린 트럭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레디 믹스드 콘크리트(ready mixed concrete)의 줄임말이었다. 시멘트에 물까지 섞은 다음, 굳어지지 않기 위해 원통 모양의 교반통에 넣어 계속 돌아가면서 현장으로 수송되는 그 반죽 같은 시멘트가 레미콘이었다.


레미콘은 몰랑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계속 돌아가야만 한다. 마치 물레방아를 돌려 곡식을 찧으면 딱딱한 곡식들이 부드러운 가루가 되듯, 레미콘은 계속 돌아가며 딱딱해지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나의 '레'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레'도 끊임없이 굴려주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레'는 쉽사리 굳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계속 돌리며 기름칠을 해 주듯 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게으른 나는 나의 '레'를 방치하다가 딱딱한 돌멩이 같은 소리가 나곤 했다. 굳어진 콘크리트 같은 소리가 났다.


'레'는 한번 교정받은 적이 있으니 쉬울 것이라 착각했다. 그래서 높은 '레'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음 써 주지 않았다. 그런 나의 '레'는 굳어져 끽끽 소리가 났다. 못 들어줄 음이었다.




한번 좋은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는 잘 돌보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가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난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나의 '레'를 돌보지 않고 방치해 둔 것처럼, 이미 형성된 좋은 관계에는 별 신경을 쏟지 못했다. 특히 '가족' 이란 관계가 그랬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이해해 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떤 관계든 돌보지 않으면 굳어지기 십상인데, 난 안일하게도 이미 묶인 관계는 알아서 잘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레미콘이 돌아가기를 멈추고 쉬고 있다면 금방 교반기 안에서 굳어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멈추어 방치해 두는 동안 굳어져 버렸다.


각자 하는 일에 바빠, 어느 순간 우린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서로 필요한 말만 자동 응답기 음성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피곤에 절어 급히 밥을 먹고, 배가 불러 더 쳐진 몸은 각자 전자기기 하나씩을 끼고 소파로 향하게 했다. 같은 소파에 앉아서도 각자의 관심사가 다르니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각자의 전자 기기로 즐기고 있었다. 우린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진 못했다.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저녁을 모두가 둘러앉아 같이 먹어도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을 무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내 일에 바빠,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일일이 챙기지 못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서운했고, 남편과 아이들 역시 무심한 나에게 서운했을 것이다. 우리의 사소한 말들은 생략되고 있었고, 그렇게 우린 서로 말을 잃어가다 마치 굳어진 콘크리트에 금이 가는 것처럼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를 메우던 찰진 반죽들은 슬슬 굳어지고, 덜 중요한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우린 우리 사이의 금을 방치하고 있었다.

더 이상 뻗어나가는 금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난 선언했다.

"더 이상 이런 '레'로는 노래를 못하겠어. 레미콘을 돌려야 해. 굳어지지 않게 말이야. 내가 다시 물을 넣고 돌려볼 테니, 다 같이 돌리는 데 힘써 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편하고 이물 없는 관계에서도 그것이 굳어지지 않게 돌보는 일이 필요했다. 우린 서로 뒤섞이고, 몰랑몰랑하게 잘 섞여 있어야 했다. 서로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야 했고, 고마운 일이나 미안한 일이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잘 표현해야 했다.


레미콘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짓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우린 같은 책을 매일 조금씩 읽고 생각을 나누기로 했다. 티브이도 프로를 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보고 생각을 나누기로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주말은 식사 준비를 같이 하기로 했다. 한 뜻으로 돌아가는 레미콘은 굳어지지 않았다.


모든 관계는 돌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가족'이라는 관계라도 말이다. 어쩌면 서로가 너무 익숙해 돌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가족'이야말로 제일 돌봄이 필요한 관계가 아닐까? 제일 굳어져 버리기 쉽기 때문에 부지런히 레미콘을 돌려야 했다. 서로에게 남에게 하듯 친절하게 말하고, 남들에게 하듯이 사소한 감사도 표현해야 했다. 사사로운 감정이 담긴 작은 말들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 우리를 찰진 관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레미콘을 돌리니 우린 서로가 말랑말랑하게 잘 섞일 수 있었다.


우린 그렇게 '레'를 찾아갔다. 서로의 '레'가 높이가 맞는지 들어주며 사사롭게 서로를 튜닝해 주었다. 그러자 각자의 입에선 부드럽고 찰진 '레'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만 부르는 '레'보다 같이 부르는 '레'는 훨씬 아름답고 웅장했다.

드디어 높은 '레'를 찾았다.

"레~~~"

'레'에서 고소한 페이스트리 빵 냄새가 난다.


음치 튜닝 '레'카드--굳어지지 않게 돌아가는 '레'미콘 카드

<그림: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