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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07. 2023

서울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서울대에 입학했어도, 서울대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도, 서울대 전액장학금을 받아도 나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갈증에 목말라 있었다. 향우회를 나가도, 과모임에 나가도 다들 숨죽이고 공부한 자신들의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듯, 술과 흥청댐과 목적 없는 자유에 자신을 내던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오면 자연히 거치게 되는 수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이 회의와 방황에 허덕이고 있었을 때 동아리 아닌 동아리를 위한 자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동아리 방은 따로 없었다. 음악을 한다던지, 춤을 춘다던지, 뚜렷이 드러나는 주제(?)를 가진 동아리가 아니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의 목적을 찾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동아리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다. 007 가방을 들고 다니는 컴공과 오빠부터,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노어노문과를 다니는 한 학번 선배, 바바리를 입고 음악에 심취한 손짓을 하는 작곡과 오빠, 나랑 같은 학번인 체육교육과 남학생, 정말 기계 조립을 끝내주게 잘할 것처럼 보이는 기계공학과 오빠,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과에 있는 여학생이 이 동아리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과 친구 우리 둘만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처음 동아리 모임에 나갔을 때는 겨우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뻘쭘하게 서로를 쳐다보며 서먹하게 웃고 있었지만 우린 곧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린 수족관을 아지트 삼아 누군가 제일 먼저 수족관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테이블을 잡았고, 공강 시간이면 수족관의 우리 테이블로 모여 조용히 자기가 할 일들을 했다. 점심은 같이 먹었고, 점심 식사 후 팩차기도 같이 했다. 학관의 천 원짜리 점심을 주로 같이 먹었지만 가끔 대선배님이 방문하셔 사주는 자하연의 2500원짜리 호사스러운 점심을 먹기도 했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같이 밥을 먹고, 팩을 차고, 끄저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 일이었다. 인생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 대해서 끄저기에 끄적끄적 적었다. 형식도 없고,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이라도 상관없었다. 끄적이는 누군가가 적은 글과 그 글에 대답하는 글들로 이어지고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앉아서 글만 쓰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각자 정한 대로 여러 모습의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강제성이나 단체성을 띄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짝을 이루든, 혼자 하든 각자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사람들은 자원봉사를 한 경험담을 적기도 했고 그런 경험담에 힘입어 어떤 이들은 자원봉사를 더 열심히 할 동기를 부여받기도 했다.


자원봉사는 나의 시간과 활력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대가 없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무료로 내가 아는 지식을 나눠주기도 했고, 가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골에 내려가 시골분들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신림동 꼭대기 단칸방에 살고 있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에게 가서 친구가 되어드리기도 했고, 방황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사람과 사랑.

그것이 내가 찾던, 나를 만족시켜 줄,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해 줄 통로였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때 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삶의 느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자녀도 없이 홀홀 단신이 되어 거동이 불편한 정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의 점심을 차려드리고, 그분과 친구가 되어 자주 보지 못하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만나면 너무나 반가워지는 관계가 되기까지 내가 느낀 즐거움과 만족감.


가출을 일삼으며 일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해 방황하는 중2 유나와 만나 그녀의 고충과 이야기를 들어주며 친구가 되어, 나중에는 방학 때도 대림동에서 나를 보러 서울대까지 찾아온 유나와 먹는 맛있는 점심 한 끼에서 오는 행복감.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난 내 또래의 소녀와 편지를 주고받다 나중에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 같이 만나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느낀 우정.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다. 내가 동아리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나의 학점은 점점 낮아져만 가고, 전액장학금은 커녕 부분 장학금도 못 받는 지경이 되었지만, 난 행복했다. 그런 행복감을 공유하는 우리의 '끄저기'는 점점 권 수가 늘어만 갔고, 늘어나는 권 수만큼 동아리 안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시집 한 권이 든 소포가 내 앞으로 도착했다. 보낸 사람 란에는 'X'라고 적힌 알 수 없는 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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