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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09. 2023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누런 우편 봉투에 찍힌 소인은 그것이 서울대 우체국에서 부친 소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정확히 내가 사는 하숙집의 주소를 알고 있었고, 시집 역시 학교 안 서점에서 산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이니셜인 듯했다.  X처럼 보이는 글자와 알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알파벳. 그것이 알파벳인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이런 시집을 보낸 것일까. 레이더 망을 아무리 좁혀 보아도 그럴만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의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과 사람들과 동아리 사람, 자원봉사를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뿐인데, 그중 누가 나에게 보냈을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시집을 보냈는지 찾으려 하기보다 일단 그 사람이 나에게 주고 싶었던 시집부터 꺼내 읽기로 했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누가 보아도 사랑 고백의 시였다. 누군가 나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의 마음이 시집으로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 마음이 나에겐 너무나 무거웠다. 차라리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이 무거운 마음을 당장은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니셜을 떠올리며 이름을 조합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이 건넨 시집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시집 덕에 난 류시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누가 건넨 시집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인생의 뚜렷한 목적 없이 외눈박이로 살아온 반뿐인 내 인생에 찾아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과의 소중한 시간들이 나에겐 나의 나머지 인생을 채워줄 수 있는 또 다른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겐 모두 나를 채워줄 외눈박이 물고기들이었다.


어떤 이는 서울대를 갔으니 그런 경험도 해보지 않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원봉사를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박한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꾸리며 성실한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굳이 서울대를 가기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았어도 내가 원했다면,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내 인생의 의미를 더해 줄 많은 일들을 훨씬 이전부터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부를 위해 모른 척하며 넘겼던 인생의 많은 순간들이 후회로 밀려오진 않았을 것 같다.


혼자 있으면 혼자임이 금방 들켜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나는 오래도록 공부와 사투하며 외로웠지만, 뒤늦게서야 나를 채워줄 사람들과 사랑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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