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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20. 2023

사랑이란 것

어느 날 나에게 사랑이란 것이 찾아왔다.

그것은 내가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 한 구석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참을 수 없는 그 고통에 난 잠을 설쳐야만 했다.

고통을 참으려 하면 할수록 나는 지쳐만 가고 있다.

하루 종일 나를 옭아매고 있고, 부지불식 간에 아픔이 찾아온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젠 그 사랑이란 것을 내 삶에서 송두리째 뽑아 버려야 할 것만 같다.

살을 찢고, 피를 흘린다 해도 난 그것과 이별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감당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끄저기에 누군가 이런 글을 써 놓았다. 누군가 심한 사랑앓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해했다. 온갖 추측성 글들이 난무했고, 누군가 이 글의 주인공이 '진호'가 아니냐고 했다.


진호는 나와 동갑이지만 빠른 연생이라 한 학년이 선배인 아이였다. 선배이긴 하지만, 나이가 곧 서열인 한국 사회에 걸맞게 나는 꼬박꼬박 반말로, 친구로 그를 대했다. 진호는 인문대였고, 나는 사범대라 우리 둘은 그리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야 했지만, 난 그를 시도 때도 없이 마주쳤다.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어느샌가 그가 나타나 서점 구석에 있었고, 내가 수업을 위해 다른 건물로 이동할 때면 그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잦은,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보기도 뭣한. 어중간하게, 어색하게 우린 그렇게 자주 인사를 나누곤 했다.


글의 주인공이 '진호'라는 억측성 말들이 오고 갈 즈음, 그것이 짓궂은 후배의 장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끄저기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제가 맞춤법에 워낙 약해서...'사랑니'로 써야 할 것을 '사랑이'라고 써버렸네요. 죄송해요. 얼마 전에 사랑니를 빼고서 너무 힘들어 적은 글인데, 이 글로 피해보신 진호 형께 제일 사과드리고 싶어요. 형, 용서해 주시는 거죠?^^"


후배는 그것이 맞춤법을 잘 모른 탓이라고 둘러댔지만, 누가 보아도 그 녀석은 짝사랑을 하고 있는 진호를 골탕 먹일 속셈이었다. 진호가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난 별 관심이 없었고, 누군가가 궁금하지 않냐고 질문해 와도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고 몇 달 뒤 진호는 러시아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하숙집으로 전화가 왔다. 그땐 내 방에 따로 전화가 없었다. 주인아주머니 집으로 전화가 오면 아주머니네 거실로 가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달려가 받은 수화기에선 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러시아에서 전화하는 거야?"

"응, 러시아야."

혼란스러웠다. 왜 나한테 전화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동아리 사람들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아니,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러시아 간 애가 왜 내 생각이 났단 말인가. 하지만 난 너무 혼자 오버하는 건 아닌가 하며 다시 정신줄을 다 잡았다.

"그래, 러시아는 괜찮아? 많이 춥지?"

"응, 괜찮아."

난 무슨 말로 그의 대답을 이어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할 말도 없이 정적이 흘렀을 때 진호가 말했다.

"여기 오니까 왜 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어."

"아... 그래? 응... 난 잘 있어. 동아리 애들이 궁금해서 애들한테 전화하고 있었나 봐."

애써 나는 그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흐리게 하려고 내 쪽에서 둘러대며 말을 했다.

"아니, 너한테만 전화한 거야."

"응??? 응... 나 이거 하숙집 아주머니네 거실에서 전화받는 거라서, 통화를 길게는 못할 것 같아. 조심히 잘 지내고, 학교로 돌아오면 그때 보자. 안녕."

나는 다짜고짜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척이나 무례하게 보였겠지만, 난 아주머니네 가족과 다른 하숙생들이 다 듣는 데서 더 이상 전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내 방에 들어와 한참을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지? 혹시 진호가 짝사랑한다는 사람이 나인가? 그럼 그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도 진호가 보낸 걸까?'


난 잠을 설쳤다. 진호는 좋은 아이였지만, 나는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진호의 마음을 받아줄 여유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진호였지만, 나에게 그는 '좋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누가 보냈는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애써 아닐 거라고 그의 감정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저 동아리에 속한 친구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믿고 싶었고 그 이상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진호는 러시아에 있어. 아직 돌아오려면 몇 달 후가 될 거고. 그냥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이불을 끄집어 올려 얼굴까지 덮어버렸지만, 복잡한 생각들은 좀처럼 쉽게 덮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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