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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24. 2023

볼 빨간 단풍잎

난 이성을 대하는 데 무척 서툰 사람이었다. 대원외고를 3개월 다니던 때, 잠깐 남녀공학의 맛을 보긴 했지만, 그 3개월을 제외한 6년을 여중, 여고에서 지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난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나보다 네 살 어린 남동생이 있긴 했지만, 난 남동생을 살뜰히 챙겨주는 착한 누나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유일한 아들이라고 특별한 대접을 받는 남동생이 미웠고, 좀 더 커서는 공부하느라 남동생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난 남성과 잘 지내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이성과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날 잡아먹는 그런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으면 체할 것만 같았다. 언제나 밥을 반 밖에 먹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성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난 얼굴부터 빨개졌다. 상대가 오해하기 딱 좋은 볼 빨간 사춘기 아이처럼. 볼이 자꾸 빨개져서 더욱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게 꺼려졌고, 꺼려질수록 볼은 더 빨개져만 가니 이것은 '볼 빨간'의 악순환이었다.


이런 악순환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반이 남자인데, 매번 이런 식이라면 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만 시간의 법칙'이 볼 빨간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이성과 만 시간을 보내면 그래도 이 '볼 빨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난 그들을 피하지 않고 대면하기로 했다. 내 볼이 빨개져서 그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볼 빨간 나의 모습으로 그들을 대면하기로 했다.


정말 곤혹스럽게도 나에게 대놓고

"근데 너 얼굴이 왜 자꾸 빨개지는 거야? 너 나 좋아해?"

라고 물어온 남자들도 있었다.

그럴 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고, 얼굴은 용광로처럼 더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내가 믿은 만 시간의 법칙은 진리였다. 하숙집에서는 같이 하숙하는 오빠들과 매일 아침, 가끔은 저녁을 같이 먹어야 했고, 그들과 어울려 지내야 했다. 학교는 온통 남자들로 바글바글했고, 그들과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만 시간, 하루 10시간 정도를 이성과 대면해서 지낸 천일 정도가 흘렀을 때,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즈음이 되어서야 난 '볼 빨간'의 딱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딱지가 떨어지려고 하는 그때였던 것 같다. 진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난 3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는 4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캠퍼스 곳곳이 가을로 물들고 있었고, 캠퍼스 옆 관악산도 단풍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엔 그렇게 예쁘게 물든 단풍이 없었지만, 진호가 그 단풍잎을 건네줄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스쳐갔다. 난 몇 번이고 만나자는 진호의 말에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하지만 진호의 목소리는 결연하고 단호했다. 도저히 더는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꼭 만났으면 좋겠어. 해야 할 말이 있어."


그와 만난 곳은 내가 평소 즐겨 찾던 '다향만당'이라는 신림동 골목의 전통찻집이었다. 늘 들르던 곳임에도 그날의 공기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그곳을 가득 메운 차향과 사람들의 차분한 마음향과 늘어질 듯 흐르는 가야금 소리향은 평소 내가 즐겼던 공기와 달리 슬펐다.


진호와 나는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너를 보자고 했는지 알고 있지?"

난 말없이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너를 그렇게 자주 학교에서 마주친 거, 우연이 아니야. 너랑 일부러 마주치려고 기다렸다가 지나가고 그랬어. 너 시간표 알고 있었거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2년 전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받은 적 있지? 그것도 내가 보낸 거야. 내가 러시아어로 내 이름 이니셜을 써 놓아서 몰랐겠지만..."


찻잔에 눈을 떨군 채 난 그를 더는 바라볼 수 없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밀려왔다.


"러시아 갔을 때 너 주려고 사 왔었어."

그는 조심스럽게 종이에 싼 러시아 인형들과 러시아 소년이 그려진 그림을 내게 내밀었다.

"네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사둔 거야."


난 처음으로 입을 뗐다.

"고마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흔들리는 눈을 차분히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말했다.

"난 그냥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 이제 졸업하면 너를 볼 기회가 많이 없겠지. 그래서 학교를 떠나기 전에 꼭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넌 나 같은 감정이 아니란 거 잘 알아. 그래서 나도 그동안 말 못 한 거고. 그래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지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네가 아니라고 할 걸 알지만, 난 말하고 싶었어."

그는 이미 내가 할 대답을 알면서도 고백해 왔다.

그렇게 그는 3년을 간직해 둔 자신의 짝사랑을 나에게 고백해 왔다.

"미안해… 정말… 나도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이란 거 잘 알고 있고, 친구로서 정말 좋아해. 그런데 난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닌 것 같아."

괜히 그가 준 러시아 인형만 만지작 거리며 감히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거절하는 주제에 내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괜찮아. 이미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널 보자고 한 거니까. 그래도 속은 후련하네."


그가 웃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이 선량하고 성실하고 친절한 그의 마음을 내가 아프게 하고 있다. 그의 웃음이 너무 슬프다. 슬퍼서 단풍으로 물들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더는 볼이 빨개지지 않게 되었다. 만 시간을 채운 탓도 있겠지만, 나를 그 몹쓸 '볼 빨간'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진호였던 것 같다.


가을처럼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 그때 그 시간들은 가을처럼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실수와 상처 투성이인 단풍잎들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그 순간은 서툴고, 아프고, 힘들었지만 멀리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 그때의 일들은 나에게 단풍으로 물든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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