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선 12월 말부터 내가 좋아하는 과일 라이치가 난다. 지금에서야 좋아하는 과일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좋아한 과일은 아니었다. 처음 라이치를 과일 가게에서 봤을 때 삐죽삐죽, 울퉁불퉁한 모습이 꼭 요즘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았다. 게다가 약간은 무서운 붉은색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맛있게 생겼다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울서 한 동네 살던 은혜가 호주에 놀러 왔다. 은혜는 20대의 어린 나인데도 IgA 신우신염으로 고생이 많다. 몇 달마다 투석을 해야 하고 식단 조절도 해야 한다. 그런 은혜가 요양차 멀리 호주까지 놀러 온 것이다. 은혜는 아파도 아픈 기색도 없이 밝은 아이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예쁜 동생이다. 그런 은혜에게, 호주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맛있는 걸 해주고, 먹여주고 싶었다.
은혜가 과일 가게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동네에서 제일 큰 과일 가게를 들렀다. 난 먹고 싶은 과일 다 골라 담으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혜는 정말 맛있게 생겼다며 라이치를 집어 들었다. 처음 몇 초간은 망설였다. 하지만 은혜를 위해 뭔들 못 사줄까. 울퉁불퉁 라이치 1킬로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은혜와 라이치를 먹었다. 껍질을 까는 것부터가 신기한 과정이었다. 속은 겉과 달리 매끈매끈, 윤기가 촉촉하고 크기가 꼭 자두 맛 캔디만 하다. 색깔까지 자두 맛 캔디처럼 투명한 흰색이다. 입안에 넣고 터트리자 과즙이 촤악~입안 가득 감기면서, 뽀득뽀득한 과육의 식감이 먹는 재미를 더해 준다. 오감이 놀랄 새로운 맛이었다. 겉모양으로만 판단하고 먹어보지 않았다면 이런 행복한 라이치 맛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라이치를 먹으면서 사람을 알아가게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울퉁불퉁 모난 구석이 많아 보여 쉽게 다가가기 힘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겉으로만 보고 피해 버린다면 내가 엄청난 라이치 맛을 놓쳐 버렸을지도 몰랐을 뻔했던 것처럼, 내 인생의 엄청난 친구를 놓쳐버리게 될 수도 있다. 겉사람이 부드럽게 보이지 않아도 속사람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매력들로 가득 찬 사람이 많다. 까 보지 않고는 속을 알 수 없는 라이치처럼, 알아가기 전까진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겁내지 말고, 피하지 말고 라이치와 같은 사람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본다면 뜻밖의 친구를 얻을 수도 있다.
물론 나처럼 라이치를 처음에는 겁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라이치를 처음부터 좋아하는 은혜 같은 사람도 있으니 설령 내가 라이치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다.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 은혜 같은 친구를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우리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한국인 부부가 사신다. 호주에서 한국인 이웃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워낙 부지런하신 분들이라 텃밭 가꾸기도 좋아하신다. 상추며 고추며 부추, 호박, 근대 등등 채소 부자이시다. 매번 상추며 고추를 나눠 주셔서 감사히 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름 모를 채소를 가져오셨다. ‘오크라’라고 하신다. ‘오크라’? 야채 중에서 이렇게 고급스러운 이름을 가진 야채가 또 있을까? 이름을 들으니, 마치 악기가 되어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채소다. 생긴 건 꼭 털이 보송보송한 고추 같다. 오크라는 쪄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다고 먹는 법도 알려주셨다. 저녁상엔 파랗게 쪄진 오크라를 올렸다. 식구들은 처음 먹는 야채 맛에 신기해한다. 진이 나오면서 미끄덩하게 씹히는, 정말 건강해질 것만 같은 맛이다. 요즘 말로 ‘찐 야채’ 맛이 난다. 먹고 있으니 코로나도 물리칠 것만 같다. 넉넉히 나눠 주신 덕에 저녁상에 올리고도 반 이상 남아 있다.
오크라의 초록빛은 쪽빛 초록이다. 이 쪽빛 초록이 너무 예뻐서 이번에는 그 빛깔을 간직할 요리 법을 궁리해 보았다. 그래서 지난번과는 달리 썰어서 살짝 볶아 스파게티에 넣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오크라를 자르는 순간 너무 놀라서 한참을 보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자른 단면이 너무 예쁜 것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통으로 데쳐만 먹었을 땐 몰랐었는데 단면을 자르고 보니 눈꽃 송이처럼 예쁜 오각형 꽃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오크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크라를 손에 모아 놓고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오크라를 손에 쥐고 가만히 바라보니 내가 사람을 보는 시선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각자는 사람을 보는 자연스러운 고정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얄팍한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를 쉽게 평가하는 수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오크라는 고추랑 비슷한 채소구나 하고 쉽게 단정 짓는 것처럼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 쉽게 단정 지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의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 다른 방향에서 그 사람을 보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다. 단면으로 잘린 오크라가 꽃과 같은 아름다움으로 날 매혹시킨 것처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그 사람은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떤 사람을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게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반성하게 된다. 나는 아직 그 사람의 여러 단면을 다 보지 못했다는 걸 겸손하게 인정하게 된다. 좋은 단면이 나올 때까지 내 시각을 여러 각도로 달리해 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이치를 먹을 때마다, 오크라를 먹을 때마다, 나는 내가 가진 편견을 얼마나 털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의 좋은 특성을 길러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내 곁에 은혜와 한국인 부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어 라이치와 오크라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사진출처: popsc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