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을 하려니 여기 저기 전화해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인터넷 설치며, 여러 가지 가전 제품의 배달일 확정과 자질구레한 관공서 일까지 고객센터 상담사들과 한 달 여에 걸쳐 백 통이 넘는 전화를 한 것 같다. 그런데 호주에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할 때는 들어보지 못했던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고객님, 지금 전화를 받을 상담사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입니다. 상담사에게 폭언이나 욕설은 하지말아 주세요."
상담사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안내 멘트가 나올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물론 분쟁이 되는 일 때문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분쟁의 대상이 상담사는 아닌데, 그 상담사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 업무에 더해 그런 감정적 소모에까지 시달렸을 상담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 멘트를 듣는 순간 상담사에게 최대한 정중하고 예의를 갖춰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화를 한 대부분의 상담사는 친절을 넘어 극강의 친절을 나타내보였다. 이렇게 친절히 응대해 주니 화날 일이 생겼다가도 없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상담이 끝나갈 무렵에는 대부분의 상담사들이 이런 멘트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고객님, 오늘 저의 상담이 고객님께 도움이 되었기 바랍니다.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실까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상담사 ㅇㅇㅇ 이었습니다."
호주에서도 상담사의 마무리 멘트는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인사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도(혹은 상담사의 이름을 부르며) 좋은 하루 되세요!"로 마무리 한다.
상담사가 이렇게 마무리 인사를 하면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마무리 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고객센터에 전화하는 걸 보니 대부분
"네~."로 끝나는 것 같긴한데, 사실 아직 한국을 오래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른다.
한국에 와서 이런 상담사의 마무리 인사를 받고 난 무의식 중에 호주식으로
"상담사님도 좋은 하루 되시고요, 건강하세요!"
라고 똑같이 되받아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전화기 너머 상담사가 의외라는 듯 '호호호' 웃는다.
그러고는 멋적게
"아유, 감사합니다. 고객님~"한다.
내가 다시 받아 넘긴 인사가 기분이 좋으신건지, 이런 경우가 드물어 의외라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상담사들이 아주 멋적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소리가 아주 기분 좋게 들렸다.
호주에선 상담사와 고객의 관계가 동등한 수평 관계이다. 그래서 수직관계로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부탁을 들어줘야하는 상담사가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고객들은 상담사에게 가급적 친절하게 통화하고 욕설과 폭언은 아주 드문일이다.
상담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부탁을 들어주는 고마운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고객들이 회사나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분쟁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호주에선 상담사가 전화를 받을 때 처음하는 말이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어땠어?"이다. 그러면 고객도 역시 “너는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물어 준다.
아무리 용건이 중요 해도 서로의 감정 상태를 확인하고 인사하는 것이 먼저다. 개인적 관심으로 어느 정도 우정을 나눈 후에야 전화를 건 용건을 말한다.
이것은 잘 알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의미다. 그 사람이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나타내는 존중이다.
물론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한 한국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존중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호주에서 사람에게 나타내는 존중에는 어쩔 수 없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받아야할 기본적인 존중이 있다.
내가 비록 호주가 아닌 한국에 있지만, 아무리 용건이 중요한 한국에 살고 있지만, 서로의 감정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여유를 여기서도 갖고 싶다.
상담사에게 오늘 하루어떠셨냐는 질문을 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적어도 통화가 끝날 때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인사는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