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고양이가 한 마리 살고 있다. 이름은 릴리. 릴리가 우리 집으로 입양을 온 건 17개월 전이다. 어느 분이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더 이상 못 키우겠다고 입양할 가족을 찾고 있었다. 난 생전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고양이는 요물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탓도 있지만, 어릴 때 할머니 댁에 갔다 고양이가 할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내가 고양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릴리를 만나러 갔을 때 난 릴리가 우리 가족이라는 걸 직감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릴리가 살던 전주인 집은 보기 드문 호화 주택이라 속으로 ‘고양이가 부잣집에서 잘 살고 있었구나.’했다. 그런데 집이 무척 어수선했다. 레노베이션하느라 인부들이 드나들고, 드릴 소리가 심하게 났다. 그래서 릴리는 침대 밑 구석에 숨어 나오지를 않았다. 주인이 아무리 부르고 츄르를 내밀어도 더 깊숙이 들어가기만 했다. 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주인아저씨는 릴리를 겨우 잡아 이동장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의 태도가 너무 의외였다. 2년이나 키운 고양이가 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무슨 천덕꾸러기 버리듯 이동장을 나에게 건네주더니 어서 가시라고 한다. 현관 배웅은 고사하고 거실에서 이동장을 건네받은 우리는 쫓겨나듯 그 집을 나와야 했다.
뭔가 모를 두려움과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릴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동장 사이로 보이는 릴리의 눈빛은 자세히 보니 두려움보단 안도와 호기심이 뒤엉킨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왠지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살던 집을 옮기면 고양이는 처음 며칠간은 먹지도 않고, 화장실도 안 쓰고 어디엔가 숨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릴리는 그렇지 않았다. 오자마자 여기저기를 탐색하더니 화장실부터 쓰고, 밥도 잘 먹었다. 혹시 살던 집보다 우리 집이 좁아서 답답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릴리는 식구들에게 돌아가며 부비부비도 해 주고, 첫날부터 배를 내고 눕기도 했다. 이 집의 식구가 된 걸 자신도 받아들이고 즐기겠다는 표현을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릴리는 우리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릴리는 애묘가들의 로망인 개냥이나 무릎 냥이가 아니다.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는 정도까지만 가까이 가고 거리 두기를 한다. 그렇다고 릴리가 새침하지는 않은데 부비부비도 잘하고, 애교도 잘 부린다. 단지 자신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잘 알고 거리두기를 할 뿐이다.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좋아한다고 말하듯 부비곤 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을 땐 멀리서만 지켜볼 뿐이다. 그렇다고 영 멀리 떨어져 숨지는 않는다. 나와 자유롭게 시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정이 갔다.
한 친구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개는 잘해주면 잘해주는 그 사람이 주인인 줄 알고, 고양이는 잘해주면 지가 주인인 줄 착각한다.’
정말 그럴까? 개는 정말 그렇게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동물이고, 고양이는 주인을 자기 집사로나 아는 돼먹지 못한 동물일까?
그렇지 않다. 단순히 기질적 메커니즘에서 오는 차이를 본질적인 차이로 혼돈한 사람들의 오해이다. 개는 서열 동물이다. 그래서 주인이 잘해주면, 주인을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커다란 ‘개’로 인식한다. 그러니 서열 높은 ‘개’에게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오면 왕왕 짖어대는 것도 그 사람을 서열 미확인이나, 낮은 서열의 ‘개’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다. 개는 서열 동물이라 자기보다 높은 서열자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다. 그래서 단체생활도 하지 않고, 자기의 영역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생활한다. 같은 공간에서 자신을 돌봐 주는 주인을 어미 고양이로 인식하고 각자의 삶을 꾸리는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모두는 자신의 영역을 가진 동등한 개체일 뿐이다. 그러니 개는 충성심이 강한 동물, 고양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요물이라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기질적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나는 지브리 만화를 정말 좋아한다. 내가 릴리를 키우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만화 때문이었다.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룬’ 왕자 때문에 고양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문’이라는 회색 고양이와 릴리가 닮았기 때문이다. 지브리 만화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이 릴리를 나에게 안겨 준 셈이다.
지브리 만화의 고양이들은 다들 뚱뚱하고 약간 귀차니즘에 빠진 시크한 고양이들이다. 하지만 그 시크한 고양이들이 결국 정 많고, 보은을 하는 고양이로 그려진다. 고양이는 자기만 아는 까칠한 캐릭터가 아니다.
어떤 고양이들은 새를 잡거나 쥐를 잡아서 가져온다고 하는데, 우리 릴리는 그런 간 큰 위인이 못된다. 어떨 땐 바퀴벌레도 보고 놀라 도망가는 정도니 뭘 잡아 올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릴리가 뒷마당에서 놀다가 나비를 입에 물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내게 건낸 첫 선물이었다. 어느 날은 애벌레를, 어느 날은 메뚜기를 선물로 가져오기도 했다. 고양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주인에게 보답하는 보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릴리는 싸해진 집안 공기도 바꿔주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나랑 남편이 투닥거리거나, 애들이 투닥거리면 모른 척하고 숨지 않았다. 와서 이 사람 다리를 부비고, 가서 저 사람 다리를 부비면서 마치 ‘진정해… 좀 참아…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투닥거리다가도 릴리가 우리를 부비고 가면, 싸했던 공기가 웃음으로 바뀌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묘(猫)한 경험이었다.
릴리의 골골송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릴리의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기도 했다. 릴리가 열심히 그루밍을 하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나 자신을 잘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릴리의 기지개 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내 삶을 스트레칭하듯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릴리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보며 나도 인생에 신중한 한걸음 한걸음을 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높은 담에서도 우아하게 사뿐히 착지하는 릴리를 보고 인생의 내리막 길도 우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런 고양이를 더는 누군가가 요물이니, 까칠하다느니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위한 변명이 아니다. 고양이가 억울하게 쓴 누명을 벗기고 싶어서다.
고양이는 우리에게 많은 기쁨과 가르침을 주는 신기하고 묘(猫)한 동물이다.
사진: 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