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어느 저녁
눈물은 전염된다. 내 앞에 있는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차오른다. 그가 우는 이유를 내가 알 수 없다 해도, 이런 눈물 미러링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나와 함께 울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다는 것. 모두에게 위로이다.
눈물을 같이 흘릴 수 있다는 건 공감의 표시이고, 위로의 표현이다. 그래서 내가 울 때 누군가가 ‘그만 울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감의 결핍이고, 위로의 회피처럼 느껴진다. 같이 울어주지 못할 바에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눈물을 같이 흘려주지도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할 거면서 그만 울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동물도 눈물을 흘리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감정에 의한 눈물을 흘린다. 몹시 기쁘거나 몹시 슬플 때, 몹시 괴로울 때,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범위를 넘어섰을 때 우리는 눈물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런 눈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눈물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내 감정을 달래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상대방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조 신호를 무시하고, 그만 울라고 한다면 물에 빠져 구명조끼를 던져 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누군가에게 니 힘으로 빠진 물에서 나오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완벽한 인간이었던 예수는, 곧 있으면 자신이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킬 거라는 걸 알고 계셨지만, 나사로를 잃고 상심에 빠진 그의 누이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름다운 공감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다. 해결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물의 공감을 우리는 원한다. 눈물을 멈추게 하는 해결책보다는 지금 당장 내가 느끼는 슬픔을 공감해 줄 누군가를 더 필요로 한다.
눈물이 반짝이는 건,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빛 때문이 아닐까?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빛 때문에 눈물은 더 반짝이는 게 아닐까?
빗소리를 들으면 누군가의 슬픔이 들리는 것만 같다. 누군가가 어디선가 울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서, 비가 오는 날에는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고, 울고 싶어 진다. 세상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 눈물의 사연들이 하늘에 모였다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아린다.
지금 밖에선 비 오는 소리가 난다. 세차게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나의 친구들, 러시아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들의 고통이, 그들의 슬픔이 빗소리에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눈물 맺힌 그들의 얼굴이 비를 타고 내 눈앞에 그려진다. 그들의 슬픈 사연들이 돌고 돌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호주 하늘 위에서 비가 되어 내리는 것만 같다. 내가 지금 그들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줄 수 없지만, 빗소리에 그려진 그들의 얼굴을 보고 같이 눈물은 흘리 수 있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지만 이 눈물의 위로가 비를 타고 전해지리라. 비오는 소리에 내 울음 소리는 묻히고 있지만, 그들에게 내 눈물이 닿을 것이다. 거울처럼 내 눈물이 전해질 것이다.
<사진출처: classicf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