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후 산길을 걷는 일은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입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깨끗해진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느낌이라 상쾌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며칠 많은 비가 내린 후 주어진 오후 햇살이 귀하고 고맙다. 오후 햇살을 좀 더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즐기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산을 올랐다. 비에 젖은 풀들이 촉촉해진 숨결을 내몰아 쉬고 있고, 촉촉이 젖은 바람소리는 내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주는 듯하다. 이제 호주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산속 어느집 굴뚝에서 나오는 나무 타는 냄새가 걷는 길을 가득 채워주고 있다.
매번 같은 길을 걷지만, 매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때의 산은 지금의 산이 아니고, 그때의 길도 지금의 길이 아니다. 이제 산은 가을 산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내게 가을 선물을 꺼내어 주고 있다. 비가 온 후 산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비와 함께 나무의 꽃들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도 내리고, 꽃도 내리고, 산길은 꽃비로 가득하다. 꽃비가 내린 산길 위를 걷는 것은 빨강머리 앤이 벚꽃 숲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는 것만큼 낭만적인 일이다. 차마 밟고 지나가기 아깝기는 하지만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간다.
산길을 걸을 때 또 다른 좋은 점은 산길을 걷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뒤에서 오시던 빨간 셔츠를 곱게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씩씩한 걸음으로 우리 옆을 지나가신다. 비 맞은 산속 풀잎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으로 우리에게 인사하신다. 젊은이들보다 걸음이 빠르시다. 허리도 곧게 펴고 걸으시는 자태가 비를 머금고 쭉쭉 뻗은 나무만큼 멋있으시다. 빠른 걸음을 걸으시다 길가에 놓인 손수레 앞에서 걸음을 멈추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도 손수레가 있는 쪽으로 가 보았다. 손수레 안에는 초코(Choko)*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주에는 라임이 한 바구니 담겨 있었는데, 오늘은 초코가 손수레 담겨 있다. 산속에 사는 넉넉한 인심의 누군가가 산길을 지나는 행인들 가져가라고 손수레에 초코를 담아 두었다. 초코가 담긴 손수레 앞에서 할머니와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자신을 피아노를 치시는 음악가라고 소개하시는데, 예전에 한국 학생을 홈스테이 하며 가르쳐 보신 적이 있다고 하신다. 그때 그 한국 학생이 해 준 한국 음식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한국 사람은 초코를 어떻게 해 먹냐고 물어보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는 초코를 몇 개 집어가셨고, 우리도 몇 개를 손에 들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되니, 산길을 오르는 기분이 더 좋아진다. 이렇게 많이 받고서 산길을 내려가면 나도 무언가를 나눠주고 싶어 진다. 오늘 받은 이 초코를 누구와 나눌지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산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산으로부터 받은 것을 또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게 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초코를 나눠준 누군가처럼, 산은 나에게 나누는 일을 가르쳐준다. 주는 일은 받는 일보다 어김없이 더 행복한 일이다. 받아도 행복하지만 주면 더 행복한 것은 우리가 산을 닮아서이고, 산은 산을 지은 누군가를 닮아서 일 것이다.
내가 아낌없이 주는 산을 오르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산을 배우기 위해서다.
아낌없이 주는 삶을 배우기 위해서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어쩜 이 초코(Choko)가 생소할지 모르겠다. 초코는 초콜릿 맛이 나는 야채가 아니고 달근한 무 맛이 나는 야채다. 볶아 먹으면 달달하니 너무 맛있고, 장아찌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사진:나무향기>